마5:38-42
제목 : 성결을 파수하라
성결은 깨끗함과 구별입니다. 깨끗하다는 것은 곧 선하다는 것입니다. 구별하면서 맺어지지 않으면 선은 안됩니다. 땅 위의 선은 아니라 올바른 구별 끝에 맺혀지지 않는 것이면 하나님의
심판에 통과 못합니다. 그러므로 선의 뿌럭지는 구별입니다.
구별은 하나님 보기에 악의 근원같이 보여집니다. 그 이유는 그 구별의 중심이 하나님의 근거하고 시작하는 것이며 인간을 근거함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입장의 무지한 지혜로 볼 때 불리하게 보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는 종교면의 계명과 도덕면의 계명이 모순되게 보일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도덕면으로 기울여지면 사람이 옳다고 하고 종교면으로 기울어지면 오해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종결적으로는 종교면에 합치된 것에 도덕면에 합해지며 도덕면에 합함은 아담, 하와입니다.
바벨탑 쌓을 때같이 불행을 초래합니다. 이 성결은 귀한 것입니다. 적은 성결이 큰 열을 맺는 수도 있고 적은 불의가 큰 불행의 열매 맺는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는 한 말로 말하면 성결의 도라 하겠습니다. 역대에 모든 성도들이 일생동안 힘써 싸운 것은 성결을 가지려 하는 노력이요, 성결 뺏기지 않기 위하여 노력하였던 것이 그들의 생활의 반 이상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땅위의 사람들에게는 의무가 많습니다.
국가에 사회에 가정에 각 기관에 대하여 인간의 의무가 너무도 그 종류가 복잡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분망합니다. 그러나 성결에서는 크게 나누어서 구속받은 성도에게 할 일은 두가지뿐이라고 합니다.
1. 자신에 성화되는 이 성결이며
2. 하늘에 가서 얻을 상급 위하여 노력하는 이 둘 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엡1:4에 보면 창세전에 택한 자를 흠 없게 하여 하나님의 자녀를 삼으신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물론 이것을 법적으로 하나님 앞에 칭의 받는 것을 말하는 것인 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칭의는 구원의 전부가 아니고 구원 순서의 하나인 것입니다. 그 칭의의 목표는 성결입니다. 그러므로 법적 칭의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 설 때에는 실제로 그 자체에 있어서 성결되지 못한 것은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할 것을 의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에 여러군데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행을 무시하고 은혜를 강조하다가는 오히려 치우쳐 실패될 때가 많고 하나님의 은혜 무시하고 행을 강조하다가 실패된 교파가 많습니다. 행을 강조하는 교파는 은혜 무시하여 행을 강조하다가 치우쳐 실패한 교파가 많습니다. 은혜 강조하는 교파는 행을 무시하여 반(半)율법주의자로 타락하고 실패하는 교회사는 교회 안에 많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치우치지 않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전적은혜의 도입니다. 인간은 전적 부패한 인간이요 그러나 최후에 주님 앞에 설 때에는 흠과 티와 주름잡힘이 없는 완전한 자만이 설 것을 성경은 말합니다.
행함은 전적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되 흠과 티와 주름잡힘이 없이 성화 일으킨 그것이 하나님의 택한 자라고 표시하는 것입니다.
요일3:3 그리스도를 향하여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게 하라 했습니다. 우리는 완전 성결로 주 앞에 설 자라는 것을 표대로 삼고 나가는 자가 되어야겠다.
고전4:4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자책할 것을 찾지 못하나 자기가 자기 책망 찾지 못하기까지 회개 다 했기 때문에 이를 가리켜 시편에 의롭다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이 아니고 인간으로 의롭다 하는 것을 성경은 말합니다. 이는 과격한 말 같으나 요일3:9에 보면 하나님께로 난 자는 정죄하지 않는다 했습니다. 유24에 흠없는 자를 만들어 영광 앞에 세우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벧전1:16에도 너희 아버지께서 거룩하시니 너도 거룩하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것을 표준으로 삼아서 나아갈 때 내가 죄인이라는 말이 나오겠습니다.(고백) 교만한 자 교만 꺾어지고 자기 연약 발견되겠습니다. 바울이 죄인 중에 괴수라고 말하고 만석되지 못하여 낳은 아이와 같은 연약한 자라 함은 이 표준 가지고 그리스도인격 그대로 닮아서 그 형상 입어 그리스도가 땅에 생활한 그 생활 해보려고 하면 할수록 자기의 무능과 자기 죄인 된 것이 발견되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 본문은 성결 지키는 데에는 얼마나한 각오 가져야 할 것을 말씀하시며 어느 정도의 자본을 이 성결의 자본으로 정립하여야 할 것을 교훈한 말씀입니다. 본 본문 특히 세가지에 대해서 한 교훈은 여러 주석도 해석도 있을 줄 압니다. 그 중 전부 말하지 않고 한 면만 말하려 합니다.
① 사람에게는 몸과 생명
② 자기의 소유
③ 자기의 인격이라는 노동력
이 세 가지로 되어 있는 것이 땅위의 사람입니다.
1. 39절 '누구든지 네 오른뺨을 치면 왼뺨도 돌려대며'
이 말씀은 무저항주의가 아닙니다. 절대적 저항주의입니다.
이는 몸에 대하여 오른뺨쳐서 상할 때 왼뺨까지 상할 것 각오하고 이 말은 원수에게 전부 뺏기고 마지막 생명이 끊어져도 성결만은 내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타인 몸 해하는 것이 죄입니다. 남을 해하는 침략에 대하여 그 침략 받지 아니하려는 것은 침략자와 같은 성질입니다. 침략자의 정반대는 침략 당하라는 것입니다. 즐거워 당하는 자와 침략하는 자와는 정반대입니다.
구약에서는 정당방위를 말했으나 복음에서는 정당방위 초월하여 사랑을 말했습니다. 우리의 성결 지키려 할 때는 온 몸과 소유 다 뺏겨도 성결만을 내주지 말라는 말씀이며 성결 내주지 않으려면 온몸까지 내주지 않고는, 생명 안 내주고는 성결을 결단코 땅 위에서는 가지지 못할 것입니다.
2. 40절 너를 송사하여 속옷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이 말은 유대에 전당잡힌 그 일만이 아니고 온 세계에 대한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깊은 의미에서 보면 땅위에서 모든 사람은 침략주의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땅위에는 방어전은 전연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참된 성도에게나 있을까, 그 외에는 없습니다. 다 침략이라 할 만합니다. 이북은 이남을 이남은 이북.
그러므로 사람은 죄악이 관용하여 남의 소유를 개인의 힘으로 다 뺏어 자기 혼자 소유 만들어도 위안치 않는 것이 사람입니다. 자기의 힘이 부족할 때에는 단체의 힘을 빌려 너희 것이 되리라는 송사 권리 기관에게 의지하여 남의 소유를 무리하게 취하려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억울 당하지 않고 정당한 비판 가져야 합니다.
성결 내주지 않고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억울하게 송사하려 할 때 네 소유 뺏으려 할 때에 악한 마귀는 소유 뺏으려는 것이 아니고 성결 뺏으려 하니 겉옷 내줄지라도 성결 내주지 않을 각오하라는 그 말씀 기록한 것입니다.
땅위에 성결 가지려 하면 공의로운 법을 지키려 하면 성결 못 지킵니다. 세상은 범죄로 침략의 세상입니다. 범죄치 않고는 그 자리 지키지 못합니다. 결단코 참 성결의 생활하는 데에는 조그마한 것이라도 가지고 할 수 없습니다.
오늘 정당방위 인정한다면 결단코 성결 가지지 못합니다. 복음이요 구하는 성결은 가져지지 않습니다. 즉 소유 다 뺏길 각오하고 무엇 다 뺏겨도 성결만 뺏기지 말라는 말입니다.
3. 41절 '누구든지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이 말은 로마 병정들이 유대인에게 한 것도 되겠으니 우리에게도 복음입니다. 이 말씀의 원리는 타인의 내 전 힘, 노력을 원수가 다 빼앗을지라도 성결 내주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그의 일생을 헛수고 할지라도, 노력의 종이 될지라도 성결만은 뺏기지 말아야 합니다. 억울한 수고와 손해 본 노력만 보면 실패입니다. 그이가 요구 전에 그이에게 주어야 할 것을 준비하고 있으라.
예수님의 교훈뿐 아닙니다. 초대교회에서도 성결 지키는 데는 그랬습니다. 땅의 과학 시설의 역사가 깊어갈수록 장성한 것 보여지나 기독교는 점점 퇴보합니다.
초대교회 아벨은 생명 내어놓고 진리 지켰지 다른 것으로 안 지켰습니다. 만일 아벨이 하나님이 주신 성결보다 생명을 귀히 여겼다면 성결 내놓고 삶을 얻을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도 생명 내놨으니 만고의 예배 표준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생활은 죽음으로 성결을 지키는 것 즉 기독교의 신앙 표대는 아벨의 신앙원리입니다. 에녹은 300년간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은 성결의 사람이란 말입니다. 그는 성결지키기 위하여 300년동안 하루해와 같이 긴장했으니 그 긴장이 얼마나 귀합니까?
그러므로 성결 지키는 데는 긴장이 필요합니다. 일순간도 우리는 긴장 놓아서는 안됩니다.
그가 삼백년간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은 하나님과 나누어진 때가 없다는 말입니다. 즉 성결을 내어 준 때가 없단 말입니다. 삼백년간 긴장한 것이 얼마나 위대하냐! 다음으로 우리의 신앙 표본인 노아의 성결 볼 때에 120년간 하나님이 명한 그 명령 그대로 지켜서 성결을 파수했습니다.
120년 고독 걸음 걷기에 온 세상에 유혹 많았지만 성결 내주지 않고 타협하지 않고 구별하여 살아서 의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결 지키는 고독 각오하고 타협하지 않아야 합니다.
120년 노아는 물들 길이 많았으나 고독한 길 걸어가면서 구별의 생활했습니다. 그러므로 성결 지키는 데는 주만 바라보고 나가는 사람 아니면 성결 지키지 못합니다. 노아는 120년을 하루와 같이 지냄은 하나님과 관계가 땅위의 모든 관계보다 깊었고 땅위의 유혹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부절히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자존심이 강한 사람입니다. 자존심이 없는 사람은 성결 지키지 못합니다. 온 천하에 자기가 제일로 기독교는 알아야 합니다. 자기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부인 미색에도 자기 하나님의 성전인 몸을 더러운 음란한 이용물로 쓰지 않았습니다. 자존심이 강한 까닭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인 몸을 죄악에게 내주어서 더럽게 음란의 이용에 내주지 않는 구별했으니 성도는 자존심이 강해야 합니다. 온 천하가 내 몸 하나 내주면 산다해도 내줄 수 없습니다. 주님 외에는 내 몸도, 마음도 내주지 않는 사람이라야 하나님이 귀하게 여겨 주십니다.
자기를 금액에 정욕에게 내준 자는 정신없는 자요 하나님의 긍휼 받지 못한 자입니다. 만세전에 기억해서 택한 자기입니다. 요셉은 자기 더럽히지 않았습니다. 신불신간에 부정행위 있으면 결혼을 말아야 합니다. 만일 결혼하면 반드시 불행합니다.
믿음 후 범죄하면 주의 사업에 일하나 거리는 멀어집니다. 결단코 하나님이 가깝게 잡아 써주지 않습니다. 다윗이 의로웠으나 범죄 후 행사는 달랐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셉과 같이 자존심이 강해야 합니다. 온 천하를 희생시켜도 내몸과 내영 길러서 주께만 바쳐야합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존귀성을 알아야 하나님의 아들인 것 알아고 성결을 지킬 수 있습니다. 이삭은 우물을 7번 뺏겼으나 성결 뺏기지 않았습니다. 팔레스타인에는 물만 있으면 재산입니다. 이삭은 이것 내주어도 성결은 안 내어주었습니다..
주님은 어떤 성결을 파수했습니까?
마4:1- 마귀시험에 성결을 파수하였고 사랑하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하매 성결을 파수하였고 왕 세우려고 높이 들어도 왕의 권세 물리치며 성결을 파수했습니다.
눅10:25, 요8:6 바리새교인들이 주님 송사하는 가면을 가지고 농락해도 성결 안 뺏겼습니다. 마26:49-50 가룟 유다 암호로 예수님에게 입맞춰도 예수님은 친구라 하고 다 버리고 방해해도 소망 요동치 않았습니다.
마15:10 예수님을 시기하여 송사해도 성결 안 내 주었습니다. 조롱, 훼방, 십자가에 못박고 길가는 자 "유대인 왕 평안하냐?" 조롱하여도 성결 안 내어주었습니다. 우리는 이 뒤를 따라갈 각오 안하면 성결을 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생활은 표준이 빈약한 정도에 있었습니다.
보편적 신앙 본뜨자 하나 성결은 죄없는 완전한 성결로 준 표준입니다. 이 표준 잡고 우리가 연약하여 가지 못할 때에 죄인으로 나타나고 이대로 이루어지면 감사해야겠습니다. 이 표준 안 가지고 만족하고 교만해지고 자기에게 손해 본 일까지 하려 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결이 말하는 대로 흠과 티와 주름잡힘이 없는 자로 자기가 자기 죄악 찾을래야 찾을 수 없는 자로 이제는 둘도 데리고 가지 말고 자기단독의 성결 가지고 나가는 것이 좁은 길 걸어가는 올바른 길입니다. 몸, 소유, 생명, 인권 다 내주나 성결만 내주지 않을 각오 가지고 쉬지 않는 긴장으로 쉬지 않는 고독의 각오로 자존심 강하게 날마다 빛 가운데로 걸어가야겠습니다.
우리는 자기가 미운 사람 때문에 성결 가지지 못함은 초계단입니다. 이는 걷기 쉽습니다. 미운 사람 위해서는 피 흘려도 억울함도 견디기 쉽습니다. 그러나 천국을 사랑하는 자 데리고 갈라 하는데 시험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단독이 걸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라도 끌고 가려 할때는 성결에 좀이 먹고 인간의 방식이 나오는 것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털끝만한 것도 가지고 못가고 자기의 양심의 죄악 발견하면 주님 피에 고해서 사함 받고 천국 그대로 들어가지 못할 것 기억해야 합니다. 과거 표준은 어리석어 인간 스스로 위로 받았습니다. 이것 가리켜서 강도의 굴혈이라했습니다. 이런 일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현재 죄 가운데 있다고 낙망하지 말고 옮겨 서야 합니다. 옮길 대 구원이 있고 긍휼이 있고 죄 끊고 비로소 천국이 자기 것이라는 것 표준입니다. 이렇게 되어짐이 은혜입니다. 궁극적은 구원의 도인 것입니다. 누가 죄 안 짓는 자가 있느냐 죄 지어도 주의 피가 있으니 하는 위안제는 벗자. 죄를 아주 버려야 천국을 갑니다.
(5510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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