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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요약  
■ 성경:42누가복음18:09-14
 

눅18:9-14

이것은 비유의 말씀입니다. 비유에 언제나 상식적으로 알 것은 비유는 실상이 없는 것을 가리켜 말함이 아니고 언제든지 실상이 있는 것을 너무도 그 실상은 깊고 높고 커서 제한된 사람으로 그 실제를 알기가 어려울 때에 얕고 낮은 외부의 것으로 그를 비유하여 알게 하려 하는 것이 비유의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비유에는 그 비유보다 더 참인 실제가 있는 것을 기억하여 비유가 그러하면 그 근본은 더 그러하다는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성화를 받는 그 방법에 대해서 말씀한 것입니다. 여기는 바리새 교인과 세리, 두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바리새인은 성화의 진보가 없었고 세리에게는 성화의 진보가 있는 것을 말합니다. 바리새인이 성화의 진보가 없었던 이유는 단순합니다.

1. 11절에 '나는 다른 사람과 같지 아니함을 감사합니다' 한 것을 보면 이는 하나님과 자기와 대조하여 하나님을 본받으려는 그 신앙이 아니고 사람과 비교하려는 것이 성화받지 못한 첫째 원인입니다.

2. 11절과 12절에 보니 나는 타인들 곧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나는 일주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분의 일조를 드리고 한 것을 보면 이 사람은 타인의 잘못과 자기의 잘한 점만 발견하는 사람이니 성화를 받지 못합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 앞에 교만하였고 또 하나님의 의롭다함을 얻지를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성화를 받은 세리는 13절에 하늘을 우러러 보지 못하고 한 것을 보면 하늘은 하나님이 계시는 보좌로 인식을 한 그들이니 감히 하늘을 보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거기 계시는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두려워 떠는 마음이니 곧 하나님을 본받으려는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회개에 회개를 더 가해 가면 갈수록 죄인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은 회개하고 신망함으로만 나아가는 것이므로 회개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과 점점 가까워지고 가까워질수록 하나님의 그 형상과 자기의 형상이 밝히 드러나기 때문에 회개의 길을 걸으면 걸을수록 하나님은 점점 놀래어지게 거룩하시고 자기는 점점 놀래어지게 흉한 것이 발견되기 때문에 기독교는 성자되려 하는 자는 마지막 죄인 중 괴수 죄인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주관에서 하는 말이요 삼자가 보는 것이 아닙니다.

3. 세리는 자기의 단점과 남의 장점을 발견함이니 이는 그 근본성질이 회개에 속한 것입니다. 이유는 고쳐보려 하는 목적의 사람인 고로 자기에게 있어서는 잘못을 발견할 수밖에 없고 고쳐 보려 하는 사람인 고로 남에게 대하여서는 본받을만한 좋은 점을 찾아 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치려 하는 그 원리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고 또 창조의 근본의 능력을 가지고 오신 주님에게 고쳐야 할 바를 들고 구하였으므로 고침을 받아 돌아갔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14절에 '무릇함은 누구든지 망라하여' 하는 말입니다.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세리와 같이 자기의 성화의 체를 받을 온전한 체를 가지지 못한 자에게 향상과 진보가 있을 수 없고 자기의 잘못을 발견치 아니하는 자에게 고침이 있을 수 없는 것이매 자기가 본 받아야 할 이상의 체를 발견치 못한 자와 자기의 옳은 점만 발견한 자에게는 교만과 만족의 결과를 맺을 수밖에 없고 자기가 본받아야 할 자기로 불가능한 그 체를 발견한 자와 자기의 잘못을 발견한 자에게는 불만과 겸손의 결과를 가질 수밖에 없으므로 14절에 한 사람은 스스로 높이는 자요 한 사람은 스스로 낮추는 자라고 말씀을 하였고 거기 대한 하나님의 응보는 스스로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스스로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장점을 발견하여 자랑하려 하는 자와 부족을 발견하여 고치려 하는 자이므로 하나는 기성의 것이요 하나는 구성 중에 미완성의 것이니 기성의 것은 쇠퇴하여지고 건설중에 있는 것은 온전함에 나아가게 되는 그 원리대로 구속주 앞에서 하나는 회개함에 온전함에 나아가고 하나는 점점 쇠태하여 악화되어 나아갈 것을 가리켜 말합니다.

기성품은 점점 쇠태하고 기성 도중에 있는 것은 완전함에 나아가는 것이 만사물의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은 의의 절정을 가진 사람이요 세리는 죄인이 절정을 가진 양극단의 사람으로 족히 비교할 수 없는 현재이나 그 종말은 정반대로 세리는 의의 절정에 도달하였고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서 물리침의 절정에 도달하였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1. 하나님체 받은 사람 될 것
2. 고치려 하는 자가 되어질 것
하나님체 받은 자는 겸손해지고 고치려 하는 자는 남의 장점과 자기 잘못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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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기에 우리는 죄인으로 사는 사람은 의인이 되고 말았고 의인으로 사는 사람은 죄인되고 말았습니다. 그걸 성경에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바리새인과 세리인데 세리는 죄인이요 바리새인들은 의인들이요 열심쟁이요 정통 신앙을 가진 보수파들입니다. 이랬는데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서 쫓겨남을 당했고 세리는 하나님 앞에서 영접함을 받았다고 하지 안했습니까? 왜 바리새인이 왜 쫓겨났습니까? ‘나는 이 사람들과 같지 않습니다. 이 사람과 같이 나는 죄를 짓지 않습니다. 나는 금식도 하고 기도도 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제 장점만 보고서 날뛰었어.

세리는 죄인인 것을 자기의 단점을 보고서 하나님을 감히 쳐다보지 못해서 머리를 들지 못하고 이렇게 죄인이라고 이렇게 할 때에 주님이 그 사람을 영접했다 그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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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이 말하기를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토색도 안 하고 남에게 무슨 물질에 부정한 일 안 하고 불의도 행하지 안하고 간음도 하지 안하고 또 세리들과 같이 그렇게 그런 일도 하지 안하고 이렇게 깨끗하게 살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그렇게 했습니다. ‘또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정확하게 드립니다.’ 이랬는데 이 사람에게 대해서 뭐이 잘못됐다고 주님이 그렇게 뭐 아주 책망하는 말 했습니까? 자, 토색 안 해, 토색 안 한다 말은 다른 사람에게 물질적으로 억울한 일을 하지 안한다 그말입니다. 자기가 모든 것을 정확하게 하지 다른 사람에게 억울한 일을 하지 안한다. 그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또 불의를 행하지 안한다. 의롭지 안한 일 하지 안하고 언제든지 의롭게 한다. 또 남녀 이성면에 깨끗하게 지낸다. 이 세리와도 같지 안하다.

그렇게 자기 깨끗한 생활 한 것, 깨끗한 생활 한 것을 하나님에게 감사했으니까 하나님이 깨끗한 생활한 생활을 하게 해 준 줄 알기 때문에 감사했지. 그렇지 않습니까?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자, 토색 안 했어, 불의 안 했어, 간음 안 했어, 또 세리들과 같지 안해, 또 감사했어, 또 일주간에 두 번씩 금식해, 또 십일조 드려 뭐, 이는 만고에 암만 봐도 의인입니다. 뭣 때문에 이걸 주님이 책망을 하시고, 뒤에 보니까 10절에, 「이 사람이 저보다」 이 사람이라 말은 세리를 말합니다.

「이 사람이 저보다」 바리새인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이거 도무지 그냥 자꾸 이래 얼풋 이해를 할라 하니 이해가 잘 안 됩니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그러면 아무도 자꾸 죄는 마음대로 짓고, 죄는 짓고 ‘아이고 죄 지어 나는 죄송합니다. 죄 지어 죄송합니다.’ 끙끙 울기나 하고 죄 짓고, 죄 짓고 울고 죄 짓고 울고 ‘잘못했습니다.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죄 짓고 울고 죄 짓고 울고 또 죄 짓고 머리 숙이고 약꾸가 푹 죽어 가지고서 죄 지어 가지고서 그저 기가 턱 죽어 가지고 있고, 그 사람은 의롭다고 하시고, 또 일곱 가지가 참 온전한데, 인인 관계에 토색 안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며, 또 불의 안 한다는 게 얼마나 힘들며, 남녀 이성간에 깨끗하게 지낸다는 게 얼마나 힘들며, 또 이 바리새인과 같이 않게 그렇게 깨끗하게 지내는 게 얼마나 힘들며, 또 하나님에게 이 은혜를 감사하고, 또 금식하고, 십일조 드리고, 뭣 때문에 이 사람을 이걸 예수님은 밉상으로, 예수님께 밉상으로 보여 가지고서 「이보다」 이 바리새인보다 「저가」 세리가 ‘더 의롭다’ 그렇게 칭찬을 해 주시고 그렇게 했다 하는 것 이것 참 좀 알기 어렵습니다.

처음에 9절에 보니까,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다른 사람 무시하는 그거는 나쁘지요. 다른 사람 무시한 거는 나쁘지마는서도 다른 사람을 무시한다, 무시하는 거야 나쁘지요. 나쁘고,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하는 그만치 행하니까 행한 것만치 의롭지 뭐 딴게 뭐 있어? 행한 것만치, 일곱 가지 했으니까 행한 것만치 의롭지 않소? 행한 것만치 의롭지 뭐 딴거 어데 뭐 무한히 의롭다 하는 거 아니고 행한 거 그걸 말하면서 요거 의롭다 한다 했는데 그거 뭐이 잘못 돼? 내가 아무래도 참 이거 참 이해 못 해요. 그렇지 안해요? 이 바리새인이 남을 멸시하고 무시하고 뭐 이렇게 한다고 여기 기록했지마는서도 그저 자기 의롭게 산 것 보고 나는 이렇게 의롭게 살아서 참 이거 감사합니다 하면서 일곱 가지 깨끗한 생활했어. 토색을 안 해, 불의를 안 해, 간음을 안 해, 세리와 같지 안해, 하나님에게 감사 생활했어, 일주간에 두 번씩이나 금식했어, 또 십일조 착착 드려, 이거 하나님이 그렇게 해 주셔서 도와 주셔서 그 생활한 줄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했을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안해요? 자기를 의롭다 하기 위해서, 의롭다 하게 하는 그것도 또 해석을 하면, 하나님께 감사했으니까 하나님이 의롭게 해 줬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지 그리 아니면 감사할 턱이 있는가? 암만 봐야 이거는 흠점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주님은 왜 이 사람을 왜 밉상스레 봐 가지고 자꾸 그렇게 희망 없다 이래서 그만 그렇게 돌려 보내고, 세리는 남의 토색, 오만 죄, 거기 보니까 이 사람과 같지 않다 한 것 보니까, 거기 보니까 뭐 토색도 하고 불의도 행하고 간음도 하고 뭐 어짜고 이렇게 지금 뭐 하고 지낸 그 막살이 지낸 그 세리라 말이오. 그 사람이 옆에 증거하지 안했어요, 바리새 교인이? ‘이런 사람이라’ 이라니까, 이랬는데, 이 사람은 찍해야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렇츰 죄를 지었으니까 부끄러울밖에는, 뭐. 죄인이로소이다 하고서 머리를 들지 못하고 숙이고 이래 가지고 지금 머리를 쿡 숙이고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감히, 죄 짓고 나면 뭐 그 낯빤대기 들 수가 있습니까, 아무라도? 다른 사람 안 봐도 죄를 지으면 그만, 다른 사람이 안 본 사람 앞이야 죄 지어도 뭐 안 지은 척 하지마는서도 속에 양심이 있기 때문에 사람이라는 건 자연히 머리를 숙이고 그렇게 낯을, 낯짜구를 들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으례히 그런 건데, 그런데 세리는 그렇게 칭찬을 하고 바리새인은 그렇게 예수님께서 불의하다고 그렇게 희망 없게 보시고 이란데 여게 대해서는 좀 이상한 감이 안 생깁니까? 여러분들 뭐 이해가 돼져요? 이해가 됩니까? 암만 봐야 거기 대해서 예수님이 그 세리편을 들고 바리새인을 미워하고 이래 불의하게 이래 보시고 이라는 것 보면 어째 생각하면 말이지 예수님도 당신 앞에 머리나 숙이고 자꾸 이렇게 자꾸 하면 좋아하시는가? 이거 왜 의롭게 한 사람을 이래 자꾸 미워할까? 왜 그럴까? 저는 이 점에 대해서 뭣 때문에 예수님이 이렇게 하실까 하는 그것이 오랫 동안 의문이 돼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랫 동안 의문이 됐었어요. 됐었는데 이제 그럴 수 있는 그 이유가 있는 것을 꼭 하나 깨달았어. 하나 깨달았기 때문에 그면에서 그러하다 하는 그걸 깨닫고 보니까 예수님의 그 비판과 평가가 옳다 해서 이 설교를 많이 했습니다. 이 설교를 아마 수백 번 했을 겁니다.

수백 번 했는데, 여러분들도 되나 안 되나 그만 예수님이 미워했으니까 미워했다 그만 희망 없다고 생각해 희망 없다 이렇게 보고 누구든지 그만 죄는 마구 물 먹듯이 먹고 짓고 얼마든지 죄는 짓고, 죄는 마구잡이 짓고 부끄러워서 낯빤대기 들지 못하고 쿡 숙이고만 있으면 그만 그게 제일이로구만. 그게 제일입니까? 나는 밉상으로 보겠습니다.

죄를 안 지을라고 애쓰는 그게 예쁘지 죄는 마음대로 짓고 난 다음에 그만 죄 짓고 난 다음에 그만 쿡 숙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낯빤대기 들지 못하는 그게 더 밉상이야. 낯빤대기를 대갈빼기를 거머쥐고 뒤로 확 그거 재끼면서 ‘낯빤데기 들어 봐. 좀.’ 이라면 싶으지 그뭐 그렇게 칭찬하고 동정해 주고 싶은 마음 하나도 없어.

없는데,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비판 잘못하지는 안했을 것이고 바로 하기는 했을 터인데 뭣 때문에 이랬는고 하는 그게 좀 궁금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안 그렇습니까? 공연히 예수님이 미워하고 하니까, 사람이라는 것이 그거야 양심의 가책한 일 없으면 자기 잘못된 일 없으면 드는 것 아닙니까? 공장장이 저 오는데 자기 할 일 딱 다 해 놨으면은 공장장이 올 때에, 그거야 공장장이 오니까 오기를 기다리고 있고 공장장 오거나 말거나 두려울 것도 아무것도 없으니까 공장장이 와도 ‘오십니까?’ 뒤로 저뻥하이, 일 다 잘해 놨고 자기는 책임을 완전하게 했으니까 그럴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자기 할 일 하나도 안 하고 저 바깥에 술 먹고 있다가 일은 하나도 안 해 놨지 공장장 오면은 그 으례히 고만 쥐구멍을 어째 이래 가지고서 그거 그만 와 가지고 ‘이거 뭐이야?’ 이러면 `아이구 그만 잘못했습니다.' 자꾸 이거 그만 대가리 숙일 것 아니라? 잘못하고 대가리 숙이는 그게 좋습니까, 잘해 놓고 난 다음에 이렇게 이래 지금 뻔뻔하게 있는 게 좋습니까? 자, 자기 할 일 다 착실히 다 잘하고 뻔뻔스레 있는 사람이 좋습니까 자기 할 일 하지도 안하고서 대갈빼기 숙이고 ‘헤, 나는 잘못했습니다.’ 이라는 게 좋습니까? 그저 자기 일 하나도 안 하고 자꾸 대가리 숙이고 잘못됐다고만 하고 쿡 숙이고 있는 그 사람 좋은 사람 손 한번 들어 봐요. 아무라도 손 안 들 거라. 그 이상하지.

자기 할 일 다 해 놓고, 양심의 가책 될 거 없이 할 일 다 해 놓고 난 다음에는 뭐 그렇게 그럴 게 있어야지? 할 일 다 했으니까 마음에 이렇게 뻔뻔하게 있는, 할 일 다 해 놓고 뻔뻔하게 있는 그런 사람 그 사람이 괜찮다고 보는 사람 손 한번 들어 봐요. 나도 괜찮다고 봐요. 여러분은 괜찮다고 안 봅니까? 그게 괜찮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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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세리는 자기는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 못했다는 그것은 요 바리새인과 대조적이기 때문에 자기는, 하늘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궁창을 말하는 게 아니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는 그것은 이 궁창에 계신다 말이 아니고 완전 세계에, 도덕적으로도 끝이 없는 제일 도덕적으로도 완전 세계 그 완전 세계를 가리켜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위에 있다 말이 아니고, 평가적으로 가치적으로 도덕적으로 또 모든 사람에게 유리케 그 사랑적으로 지식적으로 지혜적으로 선적으로 진실적으로 모든 면에 완전 세계 그 세계를 가리켜서 하늘이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86080150)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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