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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 성경:60베드로전서01:01
 

벧전1:1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
아시아 부근의 지명들입니다. 로마 본토가 아닙니다. 본서의 내용을 보면 환난을 당하는 성도들을 바로 깨우쳤습니다. 환난의 중심지는 로마인데 로마에 보내지 아니한 것을 보아 본서의 기록 장소가 로마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나그네'
나그네는 자기의 본토가 아닌 본향이 아닌 타국살이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타향이요, 본가가 아니요 남의 집에 임시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믿기 전에는 이 세상이 본향이요, 본국이요, 본가였는데 이제는 타국이요 타향이요 타가와 같습니다. 하늘나라가 우리의 본가가 된 것은 예수님으로 인해서 완전히 거듭난 새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새 사람이 된 때부터 천국이 우리의 본향입니다. 즉 우리가 근본 지음을 받을 때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아 에덴동산에서 살았으나 범죄하여 타락함으로 쫓겨 나왔습니다. 우리의 본향 천국의 모형이 에덴동산이었습니다. 이제는 중생으로 하나님의 자녀 되고 하나님의 진리와 생명의 나라가 우리의 집이 되었으니 이 세상은 우리에게는 나그네 기간입니다.

첫째로, '나그네에게 보낸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첫째로 알고 기억하고 있을 것은 우리가 나그네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의 몸에는 각양의 지체들이 있어서 각각 떨어지면 지체노릇을 하지 못하고 전체적인 몸의 본분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도 체계적으로 기억하고 알고 연구하고 사용하면 몸의 지체의 체계와 같이 바로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체계적으로 가지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오나니 이 진리는 모든 것보다 강합니다. 이것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하나님께서 진리라는 방편과 진리의 힘을 가지고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진리를 체계적으로 기억하고 연구하여서 알고 사용하면 생명의 것이 나옵니다. 이 진리는 사람을 만드는 과학이라고 표시할 수 있습니다. 과학이란 말은 물질에 쓰는 명사인데 물질도 구비치 않으면 그 물질로서의 과학품은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물질계를 통치할 만물의 영장인데 이 진리는 그것보다는 세밀하고 구비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구비하여 있지 않고 부분적이면 죽은 것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나 체계적이 아니면 즉 일부분만 가지는 것이니 폐단을 일으킵니다. 기억도, 사용도, 앎도 한 부분만 알고 있으니 더욱 안 것만큼 폐단입니다. 그것이 효력을 나타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해도 안 되는 것은 단절적이요 부분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도나 무슨 신앙행위에 응답이나 성과가 없으면 하나님에게 대해 의심이나 불만 불평을 하지 말고 여기에 구비가 안된 것을 깨닫고 체계적으로 전부의 균형을 찾아야할 것입니다. 우리의 인격도 체계와 균형이 안 맞으면 이와 같습니다. 성경을 모르면서 기도나 명상이나 하고 또 실행치 않고 남만 가르치고 자기를 논평함이 없이 다른 사람에게만 적용하면 다 이와 같은 병신이 되고 맙니다. 세상에서도 천해집니다.

작더라도 체계적이면 누구라도 아름답고 귀한 것이 됩니다. 참 사람의 미가 나옵니다. 참 사람의 미가 안 나오는 것은 다 기형인 까닭입니다. 기형적인 것은 징그럽고 흉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작더라도 체계적이면 아름다운 것이 나옵니다. 체계적인 말씀으로 첫째가 '나그네'입니다. 나그네가 되어야 이 말씀을 배울 수 있고 알 수 있고 쓸 수가 있습니다. 정직도, 절제도, 소망도, 의도, 사랑도 다 나그네로서 해야 체계적입니다. 아니면 단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그네이니 나그네 생활이 재미있으면 못 씁니다. 그러면 본향 준비가 등한히 됩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를 나그네로 두지 않으십니다. 나그네의 생활 자체에서 성공을 노리면 본국 준비가 등한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영원히 나그네로 두시지 않고 본국 가서 살 준비가 완료되면 어서 데리고 가시려고 하심이 하나님 아버지의 욕망이십니다.

예를 들면, 본국의 아버지가 아들을 타국에 보냈으면 그 아버지는 아들이 성공하여 본국에 돌아오기를 심히 바라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과거에 우리 나라도 8.15 해방을 맞이했을 때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을 나그네로 알고 산 자는 준비 잘하여 부하게 되어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그곳에서 재미누리고 산 자는 빈손 들고 돌아왔습니다.

마치 우리도 이와 같습니다. 이것을 알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환경이 이해가 됩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환경을 만들어주심이 이해가 됩니다. (마10:16)에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하신 말씀같이 이 세상은 정이 들거나 안정을 누리지 못 합니다. 이리 가운데 있는 양의 사모되는 것은 목자뿐일 것입니다. 이런 나의 세상이라야 합니다. 내가 이 세상에 있으나 정이 주님께만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타향살이로 성공하게 만드시려함이 목적이 아닙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함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만나는 중 이해가 안 되는 일이 많고 자기가 원망이나 불평이 나오는 것은 내가 나그네인 것을 바로 인식하지 못함에서 온 폐단입니다.

나의 사후의 영원한 하늘나라가 나의 본국임을 알게 되면 나의 이 환경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세상이 나의 본가와 본국으로 생각하니 모든 불만 불평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나그네인 것을 기억하고 보면 이 세상에서 내게 부딪쳐오는 현실들이 내가 나그네로 준비하며 사는데 가장 유리하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이심을 분명히 느낄 수 있습니다. 나의 이삿짐 싸주는 것이 이 환경들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세상에서 쫓아낸다고 불평을 하고 있느냐?  나는 세상 여기서 살려고 하는데 왜 쫓아내느냐? 고 하는 불평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기독자의 행복을 바로 찾을 수가 있습니다. 기독자의 손해보는 것, 원망할 사건 등은 대개는 썩을 것을 썩지 아니할 것으로 바꿀 수 있는 운동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영생으로 운송한 것입니다. 나의 타향살이도 이 세상 것을 영생할 곳으로 붙여보내는 것입니다. 진리로 삶이 얼마나 나에게 복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나는 곧 나의 본국으로 갈 자인데 나의 이웃이, 곧 나의 환경이, 나의 지위도, 권세도 환영도, 칭찬도, 영광도, 재물도, 전부를 본국으로 탁송시켜주는데 왜 이런 자를 보고 불만 불평을 하고 있는가? 왜 나를 쫓아내려고 하는가? 라고 불평하지 못할 것입니다. 내가 진리로 살 때에 이 세상은 나의 객지의 것을 본향으로 보내는 것인 줄 알고 감사하며 기쁨으로 살면 복 있는 자다. 우리는 장구(長久)한 시간을 소모해가며 연구해야 깨달아질 수 있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행동할 때에 나의 이성 감정 소원 욕심이 다 넘쳐서 몸으로 오게되고 몸에 가득 베어야 행동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자의 세상이 이해 못하는 손해를 만나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이유는 나그네인 것을 깨달을 때에 있습니다.  이것을 잊어버리면 이 세상을 영주처로 오산하여 실패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710503)


'사도'
사도란 예수님이 직접 불러서 대면하여 대화하시고 성경을 기록 할 수 있고 또 교회를 창립할 수 있는 특권이 있는 제자들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 때에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모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 있는 것을 하늘나라로 옮겨가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요 사랑이요, 우리 자신도 남의 것을 보관하다가 도로 내어주는 것 같은 이 세상의 빼앗길 것을 세상에 있는 동안 하늘나라에 옮겨 완전히 자기의 것을 만들도록 노력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7105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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