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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 성경:22아가01:02
 

아1:2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옛날 유대인의 풍속에는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자에게 입을 맞추는 풍속이 있었습니다. 성경에도 보면 입 맞추는 일이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는데, 누가복음 7:36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어떤 바리새인 집에 계실 때에, 어떤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 와서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추었고, 또 마태복음 26:48 이하에는 예수님께서 원하지 아니하셨지만 가룟 유다가 예수님께 입을 맞추었습니다.

이 '입맞춤은' 서로 사랑하고 밀접한 관계라는 것을 표시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게 입맞추기를 원합니다.'고 하신 말씀은 성도가 주님을 향하여 자기에게 입맞추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말씀이 됩니다.

주님 사랑이 없는 성도의 부류
솔로몬의 왕궁에는 궁녀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 궁녀들은 왕과 왕후를 위해서 일생을 살아야 합니다. 궁녀들은 왕궁에서 왕과 함께 있지만 왕의 아내는 아닙니다. 왕의 아내가 될 뻔했던 여인들입니다. 왕의 아내인 왕후가 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다른 데로 결혼해 가지도 못하고 일생 동안 왕궁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외부적으로 볼 때에는 한없이 영광스럽게 보이고 한없이 존귀하게 보이고, 권세를 가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볼 때에는 한없이 가련한 여인들입니다. 왕후는 되지 못해도 왕과 왕후를 모시고 받들고 섬기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고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왕과 왕후를 받들어 섬기고 왕과 왕후의 영광과 존귀한 지위를 보고 부러워하고, 높이고, 찬양하는 존재입니다.

궁녀의 종류도 여러 가지입니다. 왕과 왕후를 가까이 서서 직접 모시는 궁녀도 있고 왕과 왕후를 가까이에서 직접 모시지 못하고 멀리서 간접적으로 모시는 궁녀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 믿는 사람들도 예수님의 도 안에 들어와서 예수님을 중심으로 둘러서서 있습니다. 그러나 같이 주님과 서로 사랑하고 밀접한 관계를 가진 사람은 많지를 못합니다. 또 궁녀와 같은 입장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여기에 대해서 소문만 듣고 믿는 사람도 있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 안면만 보고 믿는 사람도 있고 예수님과 서로 이야기하는 정도에서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궁녀들은 왕을 수행하지만 왕과 입맞춤이 없는 것처럼 위에 말한 이런 사람들은 주님과 동거 동행하지만 주님과 입맞추는 그 자리에는 이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소문만 듣고 믿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만나 보지는 못했고 소문만 들고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다' 라고 입으로만 말을 합니다만 여전히 세상에 취하여 예수님을 찾을 여가도 없이 분주하게 날뛰고, 실상은 믿지 아니하면서 믿는 줄로 알고 껍데기로 일생을 속아서 사는 사람을 가르쳐서 '소문만 듣고 믿는 사람이다'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안면만 보고 믿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예수님과 예수님의 도를 지식적으로만 알고 믿는 자인데, 이런 사람이 믿는 사람 가운데에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서로 이야기를 하는 정도에서 믿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예수님께 기도하는 정도로 믿는 사람을 말합니다. 또 예수님과 악수하는 사람도 있으니, 예수님과 친연만 가지고 믿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실패자요, 주님과 입맞춤과 같이, 주님과 생사 고락을 같이 할 수 있는 그런 정도의 밀접한 관계는 가지지를 못한 자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안면을 보고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감동시켜 주시면 그것으로 만족하는 자입니다.

예수님이 깊이 감동시켜 주시는 그때에는 일시 회개하고 소원하고 결심하고 작정하고 각오도 하지만, 감화 감동을 받은 그대로 일을 추진시켜 실천에 옮기려고 하는 갈급까지는 가지지 못하고, 그저 자기에게 일시적으로 감화 감동되어지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사람입니다.

또 예수님과 서로 이야기하는 정도에 있는 사람은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으로서 만족을 누리는 자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예수님과 동거 동행하는 것, 곧 전지 전능하시고 어디든지 계시는 예수님이 밤낮으로 동행 해 주시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또 예수님과 악수하고 친연이 있는 자, 곧 예수님과 함께 성업을 만들어 일하고 심방하고 전도하고 일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술람미 여자처럼 참된 성도는 이런 것으로 만족치 않습니다. 이런 순서로서는 만족되어지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사랑의 관계에 있는 성도는
그러면 주님과 입맞추는 자리에까지 나아간 성도들도 있는데,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주님과 희생을 같이 하고 주님과 생사 고락을 같이 하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을 지극히 사랑하여 자기의 전부를 주님 위해서 희생의 제물로 드리지 아니하면 만족이 되지 아니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제단 앞에 자기의 전부를 기울여서 쏟지 않고서는 만족 할 수가 없는 사람이니 순교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주님을 지극히 사랑하여 십자가에서 거꾸로 못 박히는 순교를 하면서, 그의 부인을 보고, '여보시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죽을 수가 있으니, 얼마나 행복합니까'하면서 부인과 함께 기쁨으로 순교했다고 합니다.

참된 성도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으로서만 만족되지 아니하여 죽음을 개의치 아니하고 주님을 위해서 주님을 사랑함으로 죽는 데에까지 나아가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2절 처음에 '내게 입맞추기를 원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포도주의 성질은 사람을 취하게 하고 사람에게 쾌락을 주는 것입니다. 여기에 말씀하신 '포도주는' 세상의 부귀 영화를 말합니다.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낫다'고 하신 이 말씀은 메시아의 사랑, 주님의 사랑이 이 세상의 온갖 부귀 영화 보다 낫다고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취한 사람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집어던집니다. 사도 바울도 이 사랑에 도취되어 세상의 지식도, 부귀 영화도 다 버렸던 것입니다. 주님을 왕궁에서 한번 만난 사람마다 세상 것을 초개와 같이, 분토와 같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물 안에 있는 개구리와 같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보배인 줄 알고, 그런 것을 잡고 사랑하고 있으나 전지전능하시고 어디든지 계시는 주님과 비교해 보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입으로 말을 해도 실상은 '포도주' 곧 세상에 있는 부귀 영화보다 더 주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은 줄을 알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집어던지는 사람, 주님의 사랑에 도취가 되어서 사니까, 주님은 이것을 아름답게 보시고, 입맞추시기를 원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생사 고락을 같이 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순교를 애모함이 빈약하고 주님을 사랑함이 빈약합니다. 그때에도 솔로몬의 왕궁에는 궁녀들이 많이 있었고, 예루살렘에도 여인들이 많이 있었지만 솔로몬의 참된 사랑을 받은 여인은 술람미 여인뿐이었습니다. 지금도 주님의 참된 사랑을 받는 성도는 드뭅니다. 희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입 맞추어 주시기를 원해야 되는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입 맞추어 주실 수가 있는 자격과 행사가 우리에게 있어야 되지 우리가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최고의 사랑, 절정의 사랑-순교
우리가 순교를 원한다고 해서 순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과 우리가 서로 사랑하여 이 사랑에 도취가 되어야 합니다. 연애는 연모와 도취인데, 순교는 주님과 우리와의 사이에 연애의 최고 절정이요, 최종의 절정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교제 할 때에도 자격과 덕행이 부족한 사람이 가까이 오면 불쾌하고 두렵습니다. 미약한 사람이라도 상대방의 마음을 끌 수가 있는 미덕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존경은 사랑을 주고받는 획선이 되는 것이니, 이것은 이 세상에 있는 보통 계시요. 자연 계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와 믿음과 소망과 화목과 봉사를 구비하게 갖추고 있다고 해도, 자기의 전부를 바치지 못하면 안됩니다.  연약의 미덕이 없으면 안됩니다.

누가복음 22장 23절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보고 '내가 영원히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장담을 했지만 거기에 대한 준비가 없었던 것입니다. 외부적으로 각오와 간구를 가져야 하는데, 이것은 베드로 식이 아니고 바울 식이라야 합니다. 그러므로 준비를 하지 아니하고 각오만 가진다고 하면 도리어 주님을 배반하는 근거가 되고 맙니다. 준비를 하지 않고 때가 오면 순교하겠다고 하는 자는 실패하게 됩니다. 순교는 주님과 영원히 입맞추는 미덕인 것입니다. 순교는 그 사람의 평소 생활에서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사진을 찍으면 평소의 자기 모습이 그대로 나타남과 같이, 평소에 주님을 사랑하는 그 현상, 그 모양이 그대로 그때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교의 각오가 없는 자도 어리석은 사람이요, 일시적으로 순교를 각오하는 사람도 어리석은 사람이요, 자기의 연약성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의 전부를 주님께 드리지 못하는 사람도 어리석은 사람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보면 남성은 자기보다 못한 여성을 선택하고 여성은 자기보다 나은 상대를 선택합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참 부부인데, 이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부부 제도를 내신 것입니다. 아담은 자기의 갈비뼈 하나로 아내를 지었지만, 주님은 당신의 전부를 다 쏟아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 단독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사람은 주님을 참 사랑하지 못합니다. 자신이 연약한 줄 알고 자기에게 있는 것을 주님께 맡길 때에 주님은 일을 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교는 주님의 사랑을 깨달아서 그 사랑에 감격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자기에게 제일 좋은 것을 주님께 바쳐서 감사하는 마음이 뜨겁게 솟아나야 순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와 맺은 정조를 자기의 생명보다 귀하게 여기는 것이 순교 할 수 있는 요소가 되어집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연약함을 알고 주님께 다 맡기는 것과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는 것과 주님과의 맺은 정조를 생명보다 더 사랑하는 것. 이 3가지가 순교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 완전히 붙들릴 것
그런데 완전한 사랑은 결백과 희생입니다. 사랑에는 영원히 속이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해할 것이 있는 환경에서 순간도 버려 둘 수가 없는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전지전능 자라야 가질 수가 있고, 완전하시고 영원 불멸하신 자라야 사랑을 할 수가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시고 완전하시고 영원불변하시고 무소부재하신 분은 하나님뿐이시니, 하나님만이 사랑을 가질 수가 있고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사랑할 자가 실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또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다만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올 때에 받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포도주 보다 낫다'고 말씀했습니다. 포도주는 단 것인데 이것을 먹고 취하면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립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처음에는 세상 것을 취하여 가지지만, 나중에는 세상 것이 우리를 붙들어 가지고 일생 동안 그것을 위해서 살게 만듭니다. 롯의 처도, 발람도, 가룟 유다도 사소한 것에게 붙들려서 실패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영교를 가지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여기에 붙들리게 되면 일생 동안 그것을 위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와의 영교, 복음. 여기에 취하여 붙들린 자가 되어서 일생 동안 이를 위해서 살았습니다. 전부를 투자했습니다.

(주해공과)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 보다 나음이로구나'
성도들이 주님 앞에 아름답게 보여서 입맞추어 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입맞추는 일이 많았습니다. 눅7:42에 어떤 여인이 예수님의 발에다가 입맞추었고, 마26:48에 가룟 유다가 예수님께 가서 입 맞추었고 눅15:20에 아버지가 탕자에게 달려가서 입맞추었고 살전5:26에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다윗과 솔로몬을 메시아로 상징해서 말씀한 곳이 많은데 다윗은 주님의 권능면을 상징했고 솔로몬은 주님의 영광면을 상징했습니다. 그리고 왕궁에 있는 시녀와 궁녀는 다른 데에 결혼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여인들은 왕궁에 있으니까 외부로 보기에는 행복하게 보이겠으나 내부로 볼 때에는 가련한 여인들입니다. 그리고 이 여인들은 왕후가 될 수 있는 자들이지만 왕후가 아닙니다. 왕과 왕후가 즐길 때에 함께 즐기는 자들입니다. 이와 같이 왕과 왕후를 모시고, 즐거워하는 궁녀와 시녀들처럼, 오늘 주님을 믿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시녀와 궁녀들 가운데에는 솔로몬의 소문만 듣고 있는 자도 있고, 솔로몬의 안면만 볼 수 있는 자도 있고 솔로몬이 음성만 들을 수 있는 자도 있고 솔로몬과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과 입맞추는 여인은 이 시녀와 궁녀들 중에는 하나도 없고 술람미 여인뿐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도 믿는 사람 가운데에는 예수님의 소문만 듣고 따라가는 신자, 곧 '예수 믿으면 좋단다'고 하는 이 말만 듣고 믿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또 예수님의 안면만 보고 따라가는 자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지식적으로 아는 자인데, 예수님께 자기의 전부를 기울이지 아니합니다. 또 예수님의 음성만 듣고 따라가는 자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감동 받고 만족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자기에게 깊이 감동시킬 때 갈급한 심령을 가지지 못하고 감화 감동만으로서 만족을 가지는 자입니다.

그러나 참된 성도는 가슴속에 깊은 감동을 받고 또 이것이 이루어지지 아니할 때에 가슴을 치고 애를 태우는 것입니다. 또 주님과 서로 이야기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자가 있습니다. 기도하는 것으로 주님과 교제하는 것으로 만족을 가지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기도가 잘 되는 것으로 만족치 말고 그 속에서 무엇을 잡아서 무엇이 되어야 합니다. 또 주님과 악수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자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일을 하는 것으로 주님의 성역을 받드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입니다. 또 한 걸음도 나아가서 주님과 동거 동행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술람미 여인은 이런 것으로 만족치 않고 주님과 입 맞추지 않고서는 만족이 없었습니다. 교회사나 성경 역사에 보면 술람미 여인처럼 주님과 입 맞추지 아니하고서는 만족이 없고 주님과 입맞추는 것으로 만족을 누리는 성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고난의 주님과 생사를 같이하여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도 만족치 않고 주님을 사랑하므로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는 이 순교로서 만족하는 성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후서 11장 23절 이하에 보면, 주님을 위해서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받았고 사도행전 21장 13절에 보면 '주님을 위해서 죽는 것도 각오를 했다'고 말씀했고 디모데후서 4장 6절에 보면 '자신을 관제로 드린다'고 말씀했습니다. 베드로도 로마에서 순교했고 도마도 인도에서 순교했고 주기철 목사님도 '온 세계를 얻는 것보다 주님을 위해서 죽는 것이 낫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순교하기로 각오한 사람들은 서로 나누어지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서 순교하기로 각오한 신앙 동지가 아니면 나누어집니다. 참된 성도는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 희생하지 않고서는 만족이 없고 사랑하는 자에게 받기를 원하는 것은 그와 연결되는 것이요 그에게 짐이 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아니합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손 목사님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자기의 두 아들을 순교시켰으니 즐거웠고 자신도 순교를 하지 않고서는 만족이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침궁을 추상하면서, 주님의 나라를 추상하면서 영원히 후회가 없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시녀와 궁녀같이 될지 모르고 왕후가 되지 모르지만 술람미 여인과 같이 되어야 합니다.  최상림 목사님은 예수 믿는 그날부터 '나는 옥토에 뿌린 씨가 되겠다'고  작정하고 옥토에 뿌린 씨로 살다가 마지막에는 순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인의 연애적인 사랑은 오늘 우리 성도의 주님과의 연애적인 사랑을 모형한 것이요 이들은 계시의 기관인 것입니다.  사랑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는 데에서 되어지는 산물이니 연애는 사모하고 사랑하고 탐하여 취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우리와의 연애는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여 취하고자 하는 것인데 거기에는 아름다운 점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 때에 시체를 보면 가까이 하는 것이 아니라, 멀리하고 피해서 달아나고 보기 싫은 자가 오면 싫고 가까이 오면 귀찮고 괴롭고 가까이 올수록 더 추하게 보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실 수가 있고 보기를 원하시고 가까이 해 주실 수 있는 이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이것이 없으면 주님과 우리 사이에는 연애가 이루어지지 아니합니다. 우리에게 아름다운 점이 없다고 하면 우리가 주님께 아무리 기도해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술람미 여인처럼 우리도 주님과 연애를 해야 하는데 우리가 주님과 연애하려고 하면 우리에게 어떤 미덕이 있어야 하는가?
먼저 우리는 주님 앞에서 연약하면서 아름다워야 합니다. 다음으로는 서로 사귀는 것으로 만족하고 주님께서 오는 것에 답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존경은 연애와는 달라서 존경은 사랑을 받지 못합니다. 아름다움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얼굴에 화장을 하고 좋은 옷을 입는 것으로 외부를 꾸미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움은 한 시간만 지나면 더 볼 것이 없고 싫증이 납니다.

그리고 몸을 단장하는 것보다 그 속에 있는 미덕의 인격은 상대방을 끄는 힘이 강합니다. 상대방이 존경 할 수 있는 내부의 아름다운 인격, 인품을 가져야 사귐이 길어집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3장 3절에서 4절에 보면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있어서 우리의 할 일은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회개하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주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을 바라보고 범사에 감사하고 주님께 순종하고 우리는 연약한 자임을 깨닫고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할 때에 주님의 사랑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부인치 아니하면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의지하지 않고 주님께 순종치 못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배척을 당합니다. 가정에서도 보면 아내가 남편보다 더 똑똑하고 잘나고 인격이 구비하고 훌륭하면 남편은 함께 살지 못하고 달아나 버리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믿는 사람이 주님 앞에서 '나는 이런 자이니 모든 것을 할 수가 있다'고 하면서 자기를 시인하면 주님은 멀리 달아나십니다. 자기에게 세상 적인 지식이 있다고 자랑하는 사람은 주님과 사귀지 못합니다. 아무리 못나고 무식해도 자기를 부인하면 주님과 얼마든지 사귈 수 있습니다. 민첩하고 지혜롭고 날쌔도 자기의 전부를 주님께 맡기지 아니하면 불쌍합니다. 자기를 부인치 아니하면 아름다움이 없어지고 아름다움이 없이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면 주님은 싫어하시고 멀리 달아나 버리십니다. 그리고 자기도 주님을 팔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이 순교의 각오와 준비 없이 '순교하겠다'고 입으로 장담을 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순교는 입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22장 33절에 보면 베드로가 순교의 준비 없이 입으로 순교하겠다고 장담했지만 결국에는 예수님의 면전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순교는 미리부터 각오와 소원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순교는 준비 없이 입으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순교는 평소의 생활에서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순교는 평소의 생활을 사진 찍어 영원히 기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평소에 주님을 위해서 주님이 좋아서 견디지 못하여 자기의 전부를 바치는 생활을 하니까 주님은 이것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서 마지막 때에 주님을 사랑하는 최고 절정으로 옮기어 주셔서 한꺼번에 주님을 사랑하므로 다 바치게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순교의 3가지 요소는 어떤 것인고 하니, 첫째는 사랑하는 주님을 속히 가서 만나 보고 싶어하는 이 마음이 있는 것이요. 둘째로는 주님의 사랑에 감격해서 자기에게 있어서 제일 귀한 것인 생명을 바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어서 바치는 것이요 셋째로는 사랑하는 주님과 맺은 정조를, 절개를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2절 처음에 '내게 입맞추기를 원한다'고 하는 이 말은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 왕에게서 입맞춤을 받을 수 있는 아름다움이 있었기 때문에 한 말입니다. 여기 '입맞춤'은 순교를 말합니다. 생사를 같이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참된 성도는 십자가가 없는 곳에서는 만족이 없습니다. 그리고 십자가가 없는 곳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참된 성도는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서 손해보고 고난을 당하고 희생하는 데에서 기쁨과 평강을 가져오고 누립니다.

그러면 참된 성도는 무엇 때문에 순교의 사랑을 원하는가?
2절 중간에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라'고 말씀하신 대로 순교의 사랑이 포도주보다 낫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말씀하신 '사랑'은 결백과 주는 것이니, 자기의 전 인격을 쏟아서 맡기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외식이 용납되지 아니합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자를 순간이라도 해 받는 데에 둘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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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데 참 사랑에는 몇 가지 요소가 있으니 첫째는 전지의 지혜요 둘째는 전능한 능력이요 셋째는 무소부재요 넷째는 영원 불멸입니다. 참 사랑을 하려면 전지의 지혜가 있어야 하고 무소부재해야 하고 영원히 변치 아니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을 하나님 한 분에게만 이 사랑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천상 천하에는 이 사랑이 하나 뿐인데 이 사랑의 본체는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리고 여기에 말씀하신 '포도주'는 향내를 내고 취하게 하는 것인데,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먹고, 그 다음에 사람이 술을 먹고 나면 술이 사람을 지배합니다. '포도주'는 세상에 있는 소유, 영광, 취미, 향락, 부귀, 권세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니 롯의 아내나 발람이나 가룟 유다는 이 포도주에 취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사랑은 강하기 때문에 이 사랑에 붙들리면 점점 더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 17절에 보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된다'고 하신 대로 사랑으로 사랑에 이르게 됩니다. 모세도 이 사랑에 도취되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24절∼26절에 선민 해방 운동도 이 사랑에 도취되어서 이 사랑만 바라보고 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빌립보서 1장 20절에서 이 사랑에 도취되어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날마다 죽는 길로 피곤함을 느끼지 아니하고 달려갔습니다. 이 세상 부귀 영화는 일시적이요. 그림자요. 그리스도의 것은 실존의 것이요 영원합니다. 이 사랑은 포도주 보다 강하기 때문에 이 사랑에 붙들리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초개같이 집어던집니다.

(주해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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