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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요약  
■ 성경:46고린도전서15:36-42
 

고전15:36-42

우리 부활에 대해서 곡식 종자를 가지고 비유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밀이든지 다른 어떤 알갱이를 뿌리면 그 뿌린 씨가 땅에 심기지 않으면 싹이 나서 자라지를 못합니다. 그것이 땅에 심기워지면 싹이 나서 자라게 됩니다. 그 알갱이 속에 생명이 있으면 땅 속에 들어가면 썩는 거 같고 죽는 거 같으나 그것이 다시 생명으로 변화돼 가지고 자랍니다. 그러나 생명이 없는 씨는 땅 속에 들어가면 아주 썩어 버립니다. 그래서 생명 있는 씨와 생명이 없는 씨가 다르다 이렇게 여기 비유했습니다. 요런 것도 단단히 잡아야 합니다.

사람은 다 같은 사람 아닙니다. 사람은 다 같은 사람이라고 이렇게 말을 하면 모든 사람들이 다 좋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노여워하십니다. 사람은 두 종류로 나누어져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예택을 입을 자로 하나님에게 예정된 자가 있고, 하나는 창조할 때에 예택 입은 자를 위해서 이용되기 위해서 창조된 사람 있습니다. 사람은 두 종류입니다. 예택을 입은 자와 예택 입지 못한 자 두 종류가 있습니다. 에베소 1장에 보면 창세 전 그리스도 안에서 예택된 사람들이 있는 것을 성경에 똑똑히 말씀했습니다.

기독자는 제일 첫째 구원이 하나님의 예택 구원을 입습니다. 다음에는 하나님이 예정하실 때에 그 예정에 우리 구원이 들어 있습니다. 다음에는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에 구원 얻을 자로 창조됩니다. 다음에는 예수님의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활의 대속의 이 공로를 입고, 그다음에 성령과 진리로 다시 죽은 영이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그리스도인의 신앙 행위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자의 구원은 두 가지 구원이 있는데 하나는 기본구원이라고 말하고 하나는 건설구원이라 말을 합니다. 기본구원은 사람들이 노력하지 아니하고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얻어지는, 영이 살아나는 것을 가리켜서 기본구원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건설구원은 영이 살아난 그 사람이 살아난 영으로 살아서 행위를 해 가지고 자기 행위로 이루는 구원을 가리켜서 행위구원이라, 또 건설구원이라 이래서 집짓는 비유를 가지고 주님이 가르쳤습니다.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집을 지을 때에 이거는 다 불타고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지은 집은 불타지 않는다 했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일생 동안 사는 것은 자기 행위 건설, 또 자기 소유 건설, 자체 건설 이 세 가지를 건설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 믿는 이유입니다. 택한 자가 하늘나라 가는 것은 안 믿어도 하늘나라 갑니다. 죽는 날까지 죄만 지어도 하늘나라 가는 것은 갑니다. 그게 기본구원입니다. 영이 하늘나라 가는 그것은 택한 자면 다 가고, 택하지 않은 사람이면 아무리 세상에서 애를 쓰고 훌륭한 도덕을 가졌다 할지라도 못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늘나라 가고 못 가는 것은 택함을 입었느냐 못 입었느냐 하는 거기에 근거되는 것입니다.

건설구원은 택함을 입은 사람이 중생되고 난 다음에 중생된 새 생활을 하느냐, 중생은 돼도 새생활 하지 않고 내나 옛 생활을 그대로 하느냐 여기에서 구원과 멸망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지금 노력하는 것은 하늘나라 가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아니고, 하늘나라에 가는데 부활했을 때에 부활한 자의 영광이 어떠냐 하는 영광 문제, 권위 문제, 실력 문제, 자유의 모든 소유권 문제, 가치 문제 이것 때문에 지금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다 같은 사람이지마는 그 사람의 가치의 층어리는 천층 만층도 더 됩니다.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서 가치가 없고 사람이라서 가치가 있는 게 아니라 다 같은 사람이지마는 그 사람의 실력에 따라서 가치가 달라지고, 또 그 사람의 모든 행한 이력에 따라서 가치가 달라지고, 그 사람의 마련한 지위나 권세나 모든 인류들에게 인정을 받는 영광 그런 것으로서 가치가 차이 있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늘나라에 우리가 다 구원 얻어 가는데 구원 얻어 간 자의 그 영광과 가치와 실력이 이렇게 차이 있는 그것 때문에 우리들이 세상에서 예수 믿는 노력을 하는 것이지 천국 가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도 잘못 깨달은 사람들은 항상 하늘나라 못 가니까 지옥 안 가고 천국 가려고 애쓴다 이렇게 말을 하니까 그 사람은 평생 애쓰는 것이 천국 가기 위해서 애쓰는 일을 하고, 천국은 가기는 가는데 천국 가서 어떤 행위를 가져 가느냐, 어떤 사람이 되어져 가지고 가느냐, 모든 존재와 인류와 만물에게 어떤 관계를 맺어 가지고 가느냐 하는 여기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바로 알지 못해서 구원에 손해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씨뿌리는 비유를 가지고 말씀했습니다. 땅 속에 심는 씨앗이 생명이 있으면 그것이 썩어 가지고 자라고, 생명이 없으면 그대로 썩어 버리고 맙니다. 인류가 이 세상살이를 하는데 속에 생명이 없는 사람은 하루 살면 그만치 죽었습니다. 일 년 살면 그만치 죽었습니다. 제딴에는 사는 것인 줄 알지마는 하루 살면 하루 죽었고 50년 살았으면 50년 죽었고 그러다가 다 살자 다 죽어 버려서 영원한 멸망으로 완전히 화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속에 생명이 있는 사람은 죽지 않습니다. 생명이 있는 사람은 하루 살면 겉사람은 부패하고 죽고 속사람은 자랍니다. 이래서 성경이 말하기를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에 바울이 탄식하는 것이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에게 삼킨 바 되려고 애를 쓴다 했습니다. 죽은 고기를 산 생명 있는 것이 먹으면 생명 있는 것의 것이 됩니다.

밀을 심으면 밀에는 핵이라는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 있고 또 밀에는 분이 있습니다, 분. 가루가 있습니다. 가루는 커단하고 그 속에 생명 가진 것은 것은 핵이라고 아주 조그만한데밀 눈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땅에 심으면, 밀에 생명이 없는 가루, 고것이 땅 속에 들어가면 생명 작용으로 차차 차차 불어서 썩어 버립니다. 썩습니다. 썩으면 그게 뭐이 되는고 하니 달콤하게 아주, 질금을 질구는 사람들이 그래 가지고 싹이 나면 그 속에 분 그것이 죽어서 달콤하게 아주 당분이 됩니다. 달콤하게 아주 엿 모양으로 그렇게 됩니다. 달게 되면 고것을 고 속에 생명인 핵, 눈 고것이 그걸 다 빨아먹습니다. 그걸 다 빨아먹으면 이제 그 터오르는 밀 눈 고것이 자라 가지고 땅위에 올라옵니다.

이것이 땅위에 올라와서 제대로 살 수 있는 시기가 옵니다. 제대로 살 수 있는 그런 시점에 가서 뿌리를 파서 보면 뿌리에는 분이 하나도 없이 쪽 다 빨아먹고 껍데기만 쪼글쪼글하게 있습니다. 분은 쪽 다 빨아먹고 고 밀의 양식이 돼 가지고 됐습니다.

모든 것이 다 그러합니다. 병아리도 보면 고 속에 생명이 있는데 생명 고것이, 계란을 20일을 따뜻한 온도에 두면 고것이 차차 커 가지고 먼저 흰 것을 먹습니다. 흰자위를 먹어 가지고 고것이 병아리 형체를 가지고 고 다음에는 노른자위를 먹습니다. 노른자위를 다 먹고 나면 이 공간 공기 속에 나와도 살 수 있는 병아리가 됩니다.

병아리가 돼서 공기 속에 나올 때에는 한 사흘 음식을 가지고 나옵니다. 보면 고 노른자위를 다 먹지 않고 좀 남겨 가지고 나와서 한 3, 4일 동안은 이 공간에 나와 가지고 고 자기 체내에 있는 노른자위 고걸 졸졸 빨아먹어 가면서 그래 가지고 그 병아리가 비로소 이 공기 가운데서 살 수 있도록 그렇게 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현실을 만나면 우리 현실에는 무엇이 들어서 활동을 하느냐? 우리의 마음과 몸의 정력이 있습니다. 마음과 몸의 힘이 있습니다. 또 그 속에는 중생된 영이 있습니다. 중생된 영은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한번 중생되면 이는 영생으로 중생됐기 때문에 죽지 않습니다. 마치 밀로 말하면 그 눈과 같이 우리에게는 중생된 영이 있고 또 마음의 힘도 있고 몸의 힘도 있는데, 이것이 현실이라는 자기 현실을 닥칠 때에 심신의 정력이 그 현실에 활동하게 됩니다.

그러면 현실에서 심신의 정력이 변해집니다. 마치, 씨 종자의 그게 당분으로 돼 가지고 있는 고것을 고 속에 생명이 먹으면 고 생명이 자라서 움이 나서 땅 밖에 쑤욱 올라옵니다. 올라오지마는 생명이 그걸 먹지 않으면 썩어 버리고 맙니다. 생명이 없는 밀도 땅 속에나 물 속에나 넣어 놓으면 나중에 몰캉몰캉하게 불어서 속이 썩게 될 때는 고걸 짜서 입에 넣으면 아주 달콤합니다. 그러면 그거는 그대로 썩어 버립니다. 생명이 있는 것은 고것을 졸졸 빨아먹고 이제 그 움싹이 나 가지고 자라서 땅 밖에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현실은 우리의 심신의 정력이 있는데, 이 심신의 정력은 마치 밀이나 다른 알갱이의 분 그것이 당분된 거와 같습니다. 당분과 같은 것인데, 고 당분을 생명이 삼키면 밀이 돼 가지고 자라나옵니다. 생명이 삼키지 못하면 그거는 썩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현실 생활에서 심신의 정력을 생명이 삼키면, 산 영이 삼키면 그 정력이 산 기능이 됩니다. 산 영이 삼키면 산 기능이 되고, 그 생명이 없는 자는 생명이 그것을 삼키지 못하니까 그대로 썩어 버리고 맙니다. 또 중생된 자가 생명이 있지마는 생명이 삼키지 않으면 그거는 그만 썩어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 현실이라는 현실에는 자기의 심신의 정기와 힘, 정력. 정기와 힘 이것이 현실을 통해서 영원히 썩는 것이 되느냐 영생하는 것이 되느냐 하는 그것이 문제입니다. 둘 중에 하나입니다. 현실에서 그 정력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면 산 기능이 됩니다. 생명 없는 것들에게 삼키게 되면 죽은 기능이 됩니다.

그러면, 사람이 자기의 심신의 정력 가지고 다 현실을 삽니다. 살았으면 산 그 정력이 썩을 것을 마련했느냐 영생할 것을 마련했느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한 시간 정력 가지고 살면 그 정력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한 시간 정력으로 살면서 가만히 누워 자면 그 사람은 뭘 만들었느냐? 그 사람은 정력만 없어졌고 아무것도 만든 게 없습니다. 한 시간 살면서 어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러면 그 정력이 어학화됐습니다. 정력이 어학이 되었습니다. 한 시간 그 정력을 가지고 어떤 기계를 연구했으면 정력이 기술화됐습니다. 한 시간 그 정력을 가지고 과학에 기울이면 그 정력이 과학의 실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력으로 사는 그것이 과학의 실력이 되는 것도 있고, 이 세상 문학의 실력이 되는 것도 있고, 어학의 실력이 되는 것도 있고, 또 무슨 전투의 실력이 되는 것도 있고, 자기의 육체의 어떤 기술, 연습이나 몸에 체육이나 그런 것의 기술이 되는 것도 있고 이렇게 자꾸 화해집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고 한 시간 그 정력을 현실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할 때에 진리대로 살았습니다. 진리를 지키며 살았습니다. 진리는 자기 현실에서 지키는 것입니다. 현실에서 돈 위해서 살지도 않았고 세상에 사무를 위해서 살지도 않았고 진리를 위해 살았습니다. 또 자기는 양심으로 살았습니다. 영감으로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배피 공로를 입고 살았습니다.

마24:40-41에 보면 같은 자리에서 꼭 같이 일을 해도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한다 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한 자리에 책상에 앉아서 이 사람도 정력을 기울여서 인사 관리 하고 저 사람도 앉아서 인사 관리 했는데, 한 사람은 고 생활 한 고 한 시간이 영생으로 화해서 하늘나라 가게 되고, 한 사람은 멸망으로 화해 가지고서 멸망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한 시간 정력을 가지고 썩을 것을 만들었느냐 영생을 만들었느냐 하는 그것이 오늘 우리의 구원인 것입니다. 이렇게 기독교는 과학적이요 실질적입니다.

둘이 꼭 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매를 돌릴 때에 그때 팔레스틴에 매 돌리는 것은 미개해서 손으로 돌립니다. 하나는 밑에 돌리고 위에 돌리고 이래 돌립니다. 그러면 하나는 콩이나 밀이나 떠 넣고 이래 돌리면 가루가 됩니다. 돌릴 때는 꼭 같이 돌립니다. 같이 돌리는데 하나는 예수님이 데려가서 다 하늘나라로 올라가게 되고, 하나는 유황불 구렁텅이로 타게 된다 했습니다. 그것은 영이 타고 하늘나라 가는 걸 말하는 게 아니고 우리 심신의 기능을 말합니다. 심신의 기능이 하나는 타고 하나는 구원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거 무엇입니까? 외모는 같지마는 속에 중심이 그 자리 거기서 하나는 진리 지키는 일, 영감 소멸하지 않고 영감대로 하는 일,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고 사는 일 합니다. 한 사람은 진리 영감 그런 거 하나도 없고 직장이면 직장, 인사 관리면 인사 관리, 무슨 과학의 기술이면 기술, 밥하는 거면 밥하는 거 그것만 합니다. 진리야 어긋났든지 말았든지 영감이야 소멸이 됐든지 말았든지 예수님의 사죄, 칭의, 화친이야 벗어 버렸든지 입고 있든지 상관 없이 그것만 하는 사람 있습니다.

이러니까, 우리 현실에서 내 정력이 진리에 이용되고 영감에 이용되고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에 이용이 되면 한 시간 자기 정력이 진리와 영감과 대속의 공로에 이용을 당함으로써 한 시간 지냈습니다. 그러면 한 시간 지낸 그 정력은 없어졌는데 그 사람에게 만들어져 가지고 있는 기능은 뭐이 만들어져 가지고 있겠습니까? 우리는 현실에서 없어질 정력을 가지고 살면서 없어지지 아니할 것을 마련하느냐 없어질 것 가지고 내나 없어질 것을 마련하느냐 둘 중에 하나입니다.

본문에 썩지 않으면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 하는 것은, 밀가루의 핵, 분 그것이 썩어야 그것이 다시 생명이 삼켜 가지고 생명이 자라게 되는 것이지 그것이 죽지 않으면 따글따글해서  못 먹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현실은 뭣이 살고 있느냐? 자기 현실은 자기의 몸의 힘 마음의 힘 이 두 가지가 현실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러면 몸의 힘 마음의 힘이 살고 있는데 몸의 힘 마음의 힘 그것이 언제든지 있느냐? 아닙니다. 없어집니다. 몸의 힘과 마음의 힘은 없어집니다. 없어지는데 그것이 무엇으로 둔갑했느냐? 그것이 무엇으로 화해졌느냐? 없어질 것으로 변화됐느냐 영생할 것으로 변화됐느냐 둘 중에 어느 것이냐 하는 거기서 우리 구원이 이루어지고 안 이루어지는 것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애쓰는 것은 건설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지 기본구원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아닙니다. 천국 가기 위해서 노력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 택한 자들은 천국은 안 갈래야 안 갈 수 없는데, 천국 가서 내가 어떤 자로 사느냐? 아주 수치스러운 천한 자로 사느냐 영광스러운 존귀한 자로 사느냐, 하늘나라 갈 때에 만물이 다 환영하는 자로 사느냐 만물에게 아주 배척과 천대를 받는 자로 사느냐 그게 문제입니다.
이래서, 하늘나라에는 입고 사는 옷을 가리켜서 세마포 옷이라 했는데, 세마포 옷을 입고 하늘나라에서는 사는데 그 세마포 옷을 가리켜서 성경에 성도의 옳은 행실이라 했습니다. 행실 입고 삽니다. 하늘나라는 행실 입고 삽니다.

세상에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 사람이 아무리 좋은 양복을 입고 있어도 그 사람의 행실이 거기 따르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평생 착취나 하고 사기나 하고 협잡이나 하고 횡령이나 했는데 좋은 양복 입고 있으면 ‘아따 그놈 도적질 잘했구나. 번들번들하게 도적질 얼마나 했겠나?’ 도적질한 옷을 입고 있다 그렇게 봅니다.

어떤 성자가 아주 남루한 옷을 입고 있어도 그 사람의 행실이 다 보이기 때문에 ‘저 사람이 저렇게 성자로서 일생 동안 인간 구원을 위해서 봉사하고 이러니까 자기 몸에는 옷 한 벌을 좋은 것을 입지 못하고 저렇게 아주 남루한 그런 켸켸묵은 그런 옷을 입고 있다’ 그럴 것입니다. 그러면 헌옷 입고 있는 그것이 그 사람에게 오히려 영광이 됩니다. 이렇게 하늘나라는 자기의 행위를 입고 사는 것이 하늘나라라 하는 것을 성경에 말씀을 했습니다.

또 하늘나라는 이 세상에서 70을 살든지 60을 살든지 1년을 살든지 얼마를 살든지 자기 정력 가지고 현실 현실을 살아나가는데 그 현실에서만 만듭니다. 현실에 자기가 살 때에 그 정력으로 무엇을 만들었느냐? 그 정력을 가지고 돈을 만들었느냐 권세를 만들었느냐 지위를 만들었느냐 명예를 만들었느냐 행락을 만들었느냐 쾌락을 만들었느냐 뭐 가정을 만들었느냐 뭘 만들었느냐? 뭘 만들었든지 ‘모든 육체는 풀과 같다’ 이런 것들은 다 썩어지는 것입니다. 그때 세 가지 만든 것만 영생합니다. 진리 만든 거, 영감 만든 거, 예수님의 대속 만든 거 요거 세 가지만 영생합니다.


그런고로, 우리 믿는 사람은 영 구원은 차이가 없이 꼭 같고, 다만 자기가 일생 동안 산 생활은 영생할 것을 만들었으면 타지 않은니까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집을 짓는 거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영원히 있고,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짓는 것은 다 탔기 때문에 그는 구원은 얻으나 불 가운데 구원 얻은 거와 같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고전 3:12에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과 같으니라" 했습니다. 언제 뭐 대연각 호텔이라 하던가 거기 불이 나니까 전부 벗은 사람은 벗은 대로 나왔고 또 단벌 입은 사람은 단벌 입고 나왔고, 불 속에서 나온 사람이니까 소지품은 다 못 가지고 나왔지요.

오늘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 때에 무궁세계는 하나도 가져가지 못하고, 불타니까 발가벗은 몸으로 가는 거와 마찬가지로, 이렇게 구원 얻을 영원한 내세가 있기 때문에 이것을 생각하고 오늘 어려워도 현실에서 타지 않을 것을 마련하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타지 않을 것은 뭐인가? 진리는 타지 않습니다. 또 영감은 진리보다 더 깨끗한 것이니까 영감만 안 타고, 예수님의 사죄, 칭의, 화친의 대속의 공로만 안 타기 때문에 이 세 가지를 만든 사람은 타지 않을 것 만드는 사람이고, 이 세 가지 외에 딴것 마련한 사람은 다 타버립니다. 돈을 만들어도 그까짓 거 타버립니다. 지위 만들어도 다 타버립니다. 권세 만들어도 다 타 버립니다. 온 세상이 다 투표해서 자기를 인정해도 표 그까짓 거 암만 많이 받아봤자 다 타 버립니다.


그래서, 여기 말씀하시기를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한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이러니까, 우리가 이거 현실에서 이거냐 저거냐 둘 중에 하나입니다. 둘 중에 하나니까 요것을 깨닫고 이 죽은 것을 하지 않고 영생하는 이것을 하려고 애를 써야 이게 도어지는 것이지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 마7:24-27 / 고전3:12-15 / 고후4:16 / 고후5:4 / 마24:40-41 / 눅17:34-35

(8805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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