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시91:14에서는 '저가 나를 사랑한즉'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 범위가 넓어서 간추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그 방편이 어떠했는가 하는 거기에 다 집결돼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받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라는 말은 마음의 작용 전부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이 두 가지 사랑의 작용 외에는 없다는 말입니다.
'목숨을 다하고' 라는 말은 자기 생명이 끝날 때까지 자기 생명을 이 일을 위해서 가진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이 일만을 위해서 있는 생명이며 이 일만 하는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뜻을 다하여' 라는 말은 경영을 말합니다. 무슨 경영이든지 그 계획과 경영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야 한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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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여기 있으니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함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어서 우리를 모든 죄와 멸망에서 구출하셨다'고 했습니다. 어린아이가 부모를 사랑하는 것은 부모의 사랑을 받는 것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젖먹이 그것이 부모를 어떻게 사랑하겠습니까? 그러나 부모는 세 살 먹는 아이가 부모 사랑하는 것보다 바로 낳아놓은 갓낳은 것이 부모를 사랑하는 사랑이 더 뜨겁고 큽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모도 또 그를 더 사랑합니다. 부모를 사랑한다는 것은 부모의 사랑을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는 것은 갓낳은 것이 한 살 먹은 것과 비교하면은 부모 사랑을 더 잘 받습니다. 또 열 살 먹은 것보다는 한 살 먹는 게 더 잘 받습니다. 또 한 스무 살 먹으면 대학교나 들어갈 정도고 아주 강건할 때니까 그때는 부모의 사랑을 잘 받을 줄 알아도 열 살 먹는 아이만큼 부모의 사랑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약자가 강자를 사랑하는 것, 밑에 있는 자가 위에 있는 자를 사랑하는 것, 작은 자가 큰 자를 사랑하는 것은 큰 자의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그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크신 분이기 때문에 이분을 인간이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하나님이 지극히 크시고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니 이분을 사랑하는 것은 이분의 사랑을 받는 것 외에는 이분을 사랑하는 길이 없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는 것은 이것을 모르면 사랑한다는 것이 도리어 육적으로 사랑하는 것, 인간들이 사랑하는 것, 아내가 남편 사랑하고 남편이 아내 사랑하는 것 같은 이 땅에 사랑의 법칙을 가지고서 이 사랑의 법칙인 줄 알고 하면 도리어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가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은 어떤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 주셨고 독생자로써 죄사함을 주셨고 의롭게 해 주셨고 하나님과 화친되게 해 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사활의 대속을 해 주신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이기 때문에 이 사활의 대속을 자기가 잘 받는 것이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외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칙이 없습니다.
* 요일4:10 :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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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그러기에, 늘 말하기를 믿음 생활, '사람이 하나님 말씀대로 행동한다고 믿음 되는 것 아니다' 그런 말을 제가 늘 자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기가 행동 했다고 해서 그것이 믿음 생활 되는 것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생활 하다가 어째 참 다행스럽게 믿음 생활이 된다면, 말씀대로 살던 그것이 믿음 생활이 된다면 그는 대성공이다.' 이 믿음 생활이 됐으면 그거는 온전한 것이요 그거는 능치 못할 것이 없는 것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 생활에, 믿음 생활이 되기까지 나아가는 그 생활을 가리켜서 다른 말로 말하면은 신앙 양심 생활이라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신앙 양심 생활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대로 자기가 살라고 애를 쓰면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다가, 말씀대로 살면서 그 양심이 영감을 찾으려고 애를 써 가지고 영감을 만나 가지고 영감대로 살면 고것이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 말씀대로 살려고 애를 써서 살면 산다고 해서 성령이 인정 하는 것 아닙니다. 말씀대로 자기가 살려고 애를 써 말씀대로 삽니다. 말씀대로 살아도 말씀대로는 자기가 사는데 성령이 인정을 안 합니다. 성령이 인정은 안 하고, 말씀대로 살기는 사는데 성령님이 '좀 더' '좀 더 자꾸 재촉을 합니다.
재촉을 하는 것은 어째 그러냐? 그 사람이 말씀대로 살기는 살지만 사람의 인적 요소는 수많은 요소가 있습니다. 마음속에도 뭐 생각도 있고 뜻도 있고 욕심도 있고 감정도 있고 모든 기억성도 있고 별게 다 있는데 거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하지 안하고 남김이 있을 때에는 성령님은 안타깝지만 네가 무엇을 다하지 안했기 때문에 이것을 다하라 다하라는 것을 자꾸 사람을 통해서 깨우쳐 알려 주기도 하고 또 스스로 양심에게 알려서 양심이 깨달아 가지고 그렇게 호소하기도 하고 이렇게 해.
그 사람의 진리대로 사는 그것을 가리켜서 모두 일반들이 믿음 생활이라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세밀히 분석한다고 하면 그것은 믿음에 이를려고 애를 쓰는 생활이니 그것을 가리켜서 양심생활이라 그렇게 표시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꾸 이래 말씀대로 살라고 애를 쓰는 것이 그렇게 살 때에 성령이 보시고 이제는 됐다 할 때는 요한계시록 7장에 보면 성신의 인을 맞는다, 성신이 인을 친다, 성신이 인을 친다. '이제는 네가 여게 대해서는 됐다 인을 쳐 버리면 고것이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면 고 믿음은 고 종류대로는 능치 못할 것이 없는 그런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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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다하고'
목숨을 다한다 말은 자기가 자살한다는 말은 아니고 목숨을 다한다는 것을 무슨 일이든지 할 때에 이 일을 시작해서 아무 소유도 손해 안가고 할 수 있으면 손해 안가고 하고 이 일을 하려고 하면은 소유물을 다 내야 되면은 내 놓고라도 하나님의 뜻을 내주지는 안하고 하나님 뜻을 이루고 이것을 할라 하니까 목숨을 내놔야 될 때에는 목숨을 내 놓고라도 잡은 하나님의 뜻을 놓히지 안하고 하는 것이라 이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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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라 하는 것은 그 몇 가지를 말한 그것은 우리에게 있는 그 종류의 전부를 다 대표해 가지고서 그 몇 가지를 예를 들어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신 것이 많든지 적든지 당신이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주신 분이니까 그분이 주신 것을 알고 또 지금도 관리하고 계시니까 관리하는 것을 알고 우리의 존재를 환하게 전부 다 알지 못하심이 없이 완전히 알고 계십니다.
알고 계시는데, 자기의 있는 것을 다 가지고 그분을 상대할 때에 ‘너는 내게 대해서 그 이상 감사할라 해야 그 이상 네가 감사할 자질이 없고 네가 또 두려워할라 해야 두려워 할 자질이 없고 또 충성할래야 충성할 자질이 없고 뭐 네가 또이렇게 순종할래야 순종할 더 이상 자질이 없다. 너는 다했다.’ 이럴 때에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알아서 자기 나름대로는 자기를 다해 가지고서 자기 나름대로는 거짓이 없는 진실된 대우를 그 하나님을 대우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저가 나를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하는 그 말씀은 무슨 말씀인고 하니 하나님께 대해서 자기가 알 수 있는 데까지 자기가 진실 되게 다해서 알고 또 자기가 안 데까지 자기의 전부를 다해 가지고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우하는 그 사람은 자꾸만 전진되고 향상되고 개량돼서 나아갈 것을 가리켜 말씀했습니다.
또, 이제 닷 냥쭝 두 냥쭝 한 냥쭝을 맡겼는데 닷 냥쭝 가진 사람은 장사하니까 닷 냥쭝을 남겨 가지고서 열 냥쭝을 만들었지만 두 냥쭝 가진 사람은 받기를 두 냥쭝밖에 안 받았기 때문에 남겨봤자 넉 냥쭝밖에 안 됩니다. 그러면 넉 냥쭝밖에 안 되는데 닷 냥쭝 가진 사람은 닷 냥쭝을 남긴 것만 해도 닷 냥쭝이 되고 이 사람은 남긴 것과 자본과 다 합해서 넉 냥쭝밖에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주인이 그에게 맡기기를 두 냥쭝 맡겼기 때문에 있는 것을 다 활용해 가지고 만들었지만 두 냥쭝밖에는 못 만들었고 닷 냥쭝 받은 사람은 하나도 안 만들어도 닷 냥쭝이 되니까 만들어서 장사해서 넉 냥쭝 만든 사람보다 오히려 자기는 아무것도 힘 안 써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기는 오히려 넉 냥쭝 가진 사람을 멸시하고 자기는 하나도 힘쓰지 안했지만 닷 냥쭝을 가졌으니까 자기는 오히려 교만하고 그렇게 우월감을 가지고 탁월감을 가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거기에 대해서 심사할 때에 닷 냥쭝으로 열 냥쭝 만든 사람이나 두 냥쭝으로 넉 냥쭝 만든 사람이나 꼭 같은 칭찬을 했습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이렇게 꼭 같은 그 말 했고 ‘네가 이제 와서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해라. 네가 이렇게 적은 것 가지고서 이렇게 잘했으니까 많은 것을 내가 주겠으니까 와서 즐거움에 참여해라.’ 이렇게 대우가 꼭 같았습니다. 그 대접이 꼭 같았습니다. 그 같은 것은 하나는 열 냥쭝 가졌고 하나는 넉 냥쭝 가졌는데 어떻게 대접이 같은가? 그것은 하나님이 준 것을 다한 거게다가 근거를 두는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는 자기가 어떤 목회를 한다든지 무슨 평신도의 신앙생활을 한다든지 그 사람의 신앙생활의 결과를 보고 우리는 따집니다. 결과를 보고 ‘저 사람은 목회를 해서 지금 교인이 몇 천 명이다. 또 저거는 몇백 명이다. 또 몇십 명이다. 저거는 죽자껏 한다고 해 봤자 교인 찍해야 한 사오 명에 지나지 못한 그런 교인을 데리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뭐를 보는고 하니 그 결과를 보고서 평가를 합니다. 그 결과를 보고서 평가를 해서 참 어떤 사람은 자기가 힘을 뭐 별로 쓰지 안하고 십분지 일만 힘을 써도 몇 천 명 교인을 거느릴 수가 있고 자기는 있는 힘을 죽자껏 다 써도 몇 명 안 되는 그런 교인을 거느리게 될 때에 그 많이 거느린 사람은 결과적으로 말하면 그 사람이 큰 사람이요 그 사람이 자랑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실 때에 그 결과를 보지 안하시고 그 근본을 보십니다. 금 맡긴 비유에 심판한 것을 보면 결과를 본다고 하면 열 냥쭝 가져 왔고 넉 냥쭝 가져 왔으니까 그 사람은 이 사람의 한 배나 대우를 해야 될 터인데 대우가 꼭 같습니다. 왜? 그 결과가 하나는 넉 냥쭝 가져 왔고 하나는 열 냥쭝을 가져 왔는데 그렇게 결과적으로 말하면 대우가 달라야 될 터인데 그 대우하는 것이나 뭐 또 그에게 상을 주는 것이나 또 칭찬한 것이나 이런 것은 꼭 같습니다. 그러면 같으면, 결과는 다르나 근본은 꼭 같습니다. 근본은 같은 것이 왜 그러냐 하면 받은 대로 다 활용했습니다. 받은 자본이 그거라 그 말입니다. 받은 자본이 그것이기 때문에 그 동기나 시발, 동기 그것을 아주 하나님은 그것을 가지고 따지고 결과를 가지고 따지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당신이 적게 줬으니까 적게 준 대로 그대로 충성을 몇 분지 일을 했느냐? 적게 준 대로 다 했느냐? 많이 준 대로 다 했느냐? 많이 받아 가지고서 반 한 사람이, 반을 바쳐 충성한 사람이나 또 적게 받아 가지고서 반을 바쳐 충성한 사람이나 꼭 같은 대우해도 근본이 그렇기 때문에 적게 받아도 다한 사람과 많이 받아도 다하지 안한 사람은 그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자기가 성공을 했나 안 했나 칭찬을 받을 수 있나 없나 하는 것은 무엇을 가지고서 판단해야 되느냐 하면 결과를 가지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결과로 판단 안 하고 내가 죽도록 충성하라 했으니까 죽도록 충성했나 안 했나 거게서 판단을 해야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데까지에 판단을 바로 한 것이 되지 자기에게 있는 자본이 어떻다는 것 그것은 생각지 아니하고 만들어 놓은 그 결과만 보고서 판단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외식하는 사람입니다. 그 판단에 대해서 외식하는 사람이오.
이러기 때문에, 판단에 대해서는 자기에게 있는 것을 다했나 혹 몇십프로만 했나 백프로를 다했나 그것을 가지고서 판단하는 것이 그것이 진실된 판단이고 나머지기는 껍데기만 보고서 판단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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