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 성경:66요한계시록11:07
 

계11:7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세상에서는 언제든지 하나님 편과 사람편이 두 편이 있습니다. 하나님 편과 사람 편 두 편이 있어서 하나님 편은 사람 편에 속한 사람들을 죽이고 살리려고 애를 쓰고 또 사람 편에 선 사람들은 하나님 편에 선 사람들을 죽이려고 애를 씁니다. 하나님 편에 선 사람들은 사람 편에 선 사람들의 옛사람을 죽이고 새사람으로 살려 내려고 애를 쓰고, 또 사람 편에 선 사람들은 하나님 편에 선 사람을 죽이려고 애쓰는 이런 대립이 있는 이 세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편에 선 두 선지자, 두 감람나무, 이 증인들이 그렇게 온갖 권위를 다 가지고, 비오지 않게 하면 안 오고 또 출애굽에 있는 권세를 다 쓰고 사람을 몇이든지 죽게도 하고 하는 이런 권능의 역사를 했지만 증거를 마칠 때에는 마지막은 무저갱에서 올라온 그 짐승으로 더불어 싸워 가지고 짐승이 이기고 이 두 선지자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당했는데 그 시체가 길거리에 있고 아무도 장사하지 못하게 하고, 모든 사람들이 그 두 선지가 죽었다고 좋다고 예물을 서로 나눠주고 그렇게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사흘 반 후에 시체를 가지고 올라갔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 말씀과 예수를 증거하는 이 증거를 하면 반드시 그 두 편이 있는데, 두 편 다 좋도록 하는 그거는 창기의 신앙입니다. 두 편 다 좋게 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 속하든지 저기 속하든지 한 편에 속하지 두 군데 속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편에 속한 자의 신앙은 반드시 이 세상에게 미움을 당해 가지고 마지막에는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모두 다 죽여 놓고는 좋아서 예물을 주고 기뻐합니다. 이렇게 대적이 많고 외로운 걸음을 걷게 됩니다.

'증거를 마칠 때에' 하는 것은, 땅위에 생명이 존재하는 동안은 증거할 기간이요 증거를 마칠 때는 그때는 벌써 자기 땅위에 존재 기간은 다 끝난 때입니다. 끝났기 때문에 자기 생명이 병들거나 늙어서나 이래 죽을 터인데 생명이 끝나는 그 시간에 주를 위해서 진리를 위해서 죽는 죽음을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성도들이 아무리 박해가 많아도 하나님이 정한 수명 거기서 조금도 감소되지는 않습니다.

* 계11:9-10

(87061511)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터인즉'
주를 사랑하는 자는 수명이 딱 끊어질 때에 주를 위해서 생명이 끊어지도록 그렇게, 주를 위해서 죽는 그 일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그럴 때에 순교를 시키는 것이지 아무리 순교자라도 주님 위해서 1분도 덜 살고 죽는 일은 없습니다. '무저갱으로부터 올라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싸워서 죽이는데 저희의 증거를 다 마친 후에 순교를 당했다'  그렇게 기록했습니다. 증거는 뭐인가? 우리 기독자들이 땅 위에 사는 것은 다 증거의 의무가 있고 증거의 여건들이 있기 때문에 땅 위에 있지 증거를 다 마치면 살 거 다 살았고 할 일 다 했기  때문에 세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증거를 다 마치기 전에는 순교가 없는 것입니다.

순교라는 것은 평생 소원이 주님 나 위해서 나를 사랑하므로 말할 수 없는 고난과 죽음으로 날 사랑하셨으니 주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는 데에는 나도 말할 수 없는 고난에서 주님 사랑해야 되겠고 죽음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싶다 하는 이 소원을 일생 동안 간청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그런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정말로 네가 생명 바쳐서 나를 더 사랑하느냐? 생명을 바쳐서 나를 사랑하느냐?' 고문 고형이 아무리 되지만 생명이 끊어지는 그 고통만은 못합니다. 생명이 꿇어지는 그 고통은 사람들이 당하기 전에는 모릅니다. 그래서, 주님을 생명 바쳐 사랑하고 싶은 간절한 자에게 평생 소원으로 주님 나 위해서 생명 바쳐 사랑했으니 나도 생명 다해서 주님을  사랑해 보고 싶다 하는 그 간절한 소원하는 자들에게 그런 기회를 주는 것이 순교입니다.

(86050842)


'저희가'
이 두 증인을 가르쳐 혹설에는 사람은 일생일사가 진리인데 엘리야와 에녹은 죽지 않고 승천하였으니 죽지 아니하였고 그래서 새로 한번 죽기 위하여 나타난 것이라고 하나 이는 오해입니다. 이 두 증인은 증거를 중복하여 역설하는 말이니 진실한 증거자라 함입니다. 말과 글로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만이 아니고 그 모든 성품과 행위가 그리스도를 체 받아 그를 본 자마다 예수님을 본 거와 같이 예수님을 밝히 증거하는 진실하고 권위있는 신약시대 성도들을 가리켜 두 증인이라고 한 것입니다.


'증거를 마칠 때에'
이는 어느 한 시대의 증거나 한 사건의 증거를 마쳤다 함이 아니고 그의 살 수명대로 자기 수명을 다 산 후 죽을 때가 되었을 때라 하는 말입니다. 이 증거를 마쳤다 함은 지상교회의 총 증거인 복음운동을 필역한 것으로 보면 안됩니다. 어떤 개인적으로는 증거를 마쳤으나 또 증거를 시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증거를 마쳤다 함은 개인적으로 권위있는 증거생활을 다 마치고 별세할 때가 왔다 함이요 전체적 교회를 가리킴은 아니니 살 대로 다 산 후에 순교가 오는 것을 가리켜서 표시한 것입니다.

특히 증거의 기간은 신약시대를 3년 반으로 상징했고 고난의 증거 기간은 시체로 표시하여 3일 반으로 상징하였습니다. 기독자의 증거역인 복음생활에 있어서 권위있는 시간이 많고 주를 위한 고난의 기간은 적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고난의 기간은 일생에서 얼마 아니 되니 귀함을 알고 아껴 허비하지 아니해야 합니다. 순교는 더 살 수 있는 생명을 주님을 위해서 감수하는 거와 같이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그 수명 일각이라도 단축시킬 수 없고 수명대로 다 살고 다만 죽음을 복되게 하는 것입니다. 평소에 주님을 진실되이 사랑하며 또 평소에 다 발휘할 수 없었던 내포된 사랑의 그 실력을 시험하는 시간이요 시험하는 문제이니 그 시험의 합격은 각양 환난과 장단의 고문과 고형 죽음들이 막을 수도 끊을 수도 없는 실력있는 애정(주를 사랑함)만이 통과하도록 시험하여 방어하는 것입니다. 이 시험과 방어선을 꿰뚫고 통과하여 이제까지의 잠재한 사랑이 발표되며 또 꿰뚫어 합격되며 또 폭발되는 것이며, 외양간에 매인 천리마가 길을 얻어 마음껏 달림과 같이 사랑의 욕심에 만족을 이루는 것이니 만족(滿足)히 사랑하고 만족히 희생하고 만족히 견디어 세상에서는 더할래야 더할 수 없는 사랑의 발동의 만족의 절정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서도 또 불만하여 죽은 후에도 주를 만족히 사랑치 못하여 영원한 미련을 가지는 것이 지상에서 천국에 생활을 하는 성도입니다. 누구나 천국에 가면 다 이런 미련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서 가지는 것이 더욱 복되다. 빌1:20은 이 점을 간증하여 놓은 것입니다.

순교는 은밀한 사랑을 폭로시켜 촬영하는 것이요 결혼과 정절과 주님을 사랑함이 생명보다 귀한 증표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재세의 취미도 주님을 사랑함으로 주님께만 얻고 희생하는 것도 주님께 주고 받는 취미로 살고 이보다 더 가깝게 주님과 관계를 가지려 함에서 순교는 생겨지는 것입니다.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
지상에 있는 적그리스도의 운동을 가리킴이니 그 출처는 사탄이 왕권을 잡은 그의 거주지, 죄악의 근거지요 그와 연속되어 있는 인간의 무한정인 사욕의 부패성을 통하여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운동을 방해하는 악마와 죄악을 가리켜 짐승이라고 상징한 것인데 복음을 방해함이니 개인 가정 사회 국가 기타 이종교 또 사상 주의 학(學)등을 사탄이 이용하여 역사하는 것들입니다. 이뿐 아니라 가장 맹렬히 역사하는 것은 기독교의 이름을 가지고 사탄에게 이용되는 거짓 교회들입니다. 특히 맹수성을 가졌기 때문에 짐승이라고 합니다. (살후2:3,7-8, 단11:31,12:11, 계13:1-10)


'저희로 전쟁을 일으켜서 저희를 이기고'
살후2:7-8과 같이 하나님께서 복음운동의 방해자를 막으시고 있다가 그 증인으로 말미암아 일으킬 복음운동을 다 완료하면(살 기간이 다 찬 때) 최종적으로 순교시킬 박해를 가리켜서 여기에 일으키는 전쟁이라고 한 것입니다.

전쟁에 대하여 주의할 것은 복음운동은 어느 때나 대적과 박해를 받지 아니할 때는 별로 없고 대개 환난을 통하여 성공되는 것이요 또 환난이 있다고 하여 결코 복음이 막히거나 증인이 죽음을 당하는 그런 일은 없습니다. 여기에 있는 전쟁은 마지막 죽음을 당한 전쟁이니 평소의 박해도 심하면 성도를 죽일 수 있는 줄로 아는 것은 그 박해 자체를 하나님의 주권보다 앞세우는 불신이 되기 쉽습니다. 그 생사는 하나님에게만 주권되어 있고 박해 그것에게 주권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니엘과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역사는 이 점을 우리에게 밝혀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정인 죽음의 시간이 오기 전에는 천하가 박해해도 죽일 수가 없으며 기간이 차면 천하가 구하려 해도 일각도 더 살릴 수 없는 것이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불신하는 데서 일어난 사욕적인 죄의 보응입니다. 짐승이 증인을 이겼다 함은 세상법대로 말함이요 복음의 법대로 말함이 아니니 증인이 졌다 함이 복음의 법으로는 중복 없는 완전 승리하였다는 말입니다.


'저희를 죽일 터인즉'
이는 순교시켰다 말이오. 순교는 자기보다 평소에 주님을 더 사랑하는 자와 주님의 계명을 자기 생명보다 귀하게 가진 자가 모든 피조물의 세력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는 자와 제일 귀한 생명을 생명으로 구속하신 주님께 바쳐 주님을 사랑치 않고는 불만하여 갈급에 있어 죽도록 충성하는 성도에게 영원한 만족과 감추어 있는 사랑의 이력을 발휘시켜 살리는 지상 최후적인 주님의 선물입니다. 과거 순교자들 중에는 고문과 고형에도 단기간보다 혹독한 장기간을 더욱 기뻐하였으며 순경보다 역경적인 복음운동을 더욱 기뻐하였고 순교의 죽음도 혹독하고 장기간적인 죽음을 더욱 만족히 넘겼습니다. 이는 다 주님의 사랑의 고난을 깨달아 주님을 사랑함이 뜨거움에서 발원된 것입니다.

본장에 1260일 증거 기간도 신약시대 전부요 시체가 성 거리에 있은 지 3일 반도 신약시대의 전부를 가리킴입니다. 그러면 증거 생활 마치고 그들이 죽어 그들의 시체가 3일 반 성 거리에 있었으니 위에 말한 대로하면 신약시대가 시간적으로 이중이 되니 그 해석은 이연치 않다고 하기 쉽습니다. 또 3년 반, 곧 신약시대 전부를 증거하고 죽은 자의 시체가 거기에 연장되어 신약시대 전부인 3일 반을 시체로 있다고 하니 어떻게 신약시대 총기간을 증거하고 총기간을 시체로 있을 수 있느냐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위의 해석은 맞습니다.

3년 반의 끝과 3일 반의 끝은 교회적으로 말하면 신약시대의 끝이요 개인적으로 말하면 일생 신앙생활의 끝입니다. 그러면 한 사람으로 신앙생활의 일생을 증거로 또 일생을 시체로 지난다는 말이니 증거 생활 끝날 때가 교회적으로는 복음운동의 결말기요 시체인 박해의 결말기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증거 생활을 마침은 증거적 수명의 마침이요 시체의 3일 반되는 시간은 박해의 종말기입니다. 증거 기간과 시체 기간에 대한 기록이 순서적으로는 되어 있고 또 논리(論理)하기를 증거 말인 후에 시체의 기간이 있으니 순서적으로 되어 있으니 여기에서 사람들은 오해합니다.

여기에 순서적으로 증거가 먼저고 시체가 다음 되는 것은 복음 운동에는 증거(아이가 증거해도 증거의 권위는 아이가 아니요 전능하신 성령이시니 비밀한 의미에는 두 증인의 포함된 권위는 증거입니다.)와 시체 같이 취급받는 박해가 언제나 겸하는 것이면서 그 순서는 증거가 먼저요 박해가 다음 됨을 가리켰습니다. 본장 증거가 먼저고 시체가 다음으로 순서된 것이고, 또 증거 3년반과 시체 3일 반을 다 같은 복음 시기 전부와 개인 신앙 일생 전부 말함은 연장적 순서로 말함이 아닙니다. 신약시대 총기간과 개인 신앙 일생의 총기간이 일면은 증거요 일면은 박해이니 전교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의 총기간은 박해의 기간이라고도 할 수 있고 증거의 기간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이중의 시간을 말함이 아니고 같은 시간의 행사 양면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연고로 증거는 3년반으로 상징하고 박해인 시체 기간은 3일 반으로 상징하였는가? 개인 일생으로 말하든지 신약시대 전부로 말하든지 3년반으로 축소하여 상징했으니 기간이 얼마나 신속하며 짧은가? 그러므로 광음을 아껴 증거하여야 하려니와 시체인 주님 위한 박해는 3일반으로 상징했으니 이는 더욱 그 기간이 짧고 신속함을 중점으로 계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주를 위한 고난을 얼마나 아끼며 귀하게 여겨 기회와 그 사건을 하나도 잃지 말고 광음을 아껴 달게 순환하여 할 것을 밝히는 것입니다. 또 기독교가 아무리 박해종교라 하여도 실질적으로 권위있게 증거하는 기간과 평안하게 준비하는 기간에 비추어 몇 배나 긴 것을 또 의미합니다. 3일 반 후에 부활한 것은 주 재림으로 복음 완전 승리와 개인 부활을 다 포함한 것인데 부활 승천한 것에 그 영광의 자본은 3년반 증거보다 3일반 시체로 있던 것이 더욱 큽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교회적으로나 개인에게 있어 권위있게 증거하는 기간 평안히 준비하는 기간보다 짧은 박해 기간과 시험 기간이 부활 승천으로 주님 맞이하여 영광의 나라에 사는 때에 더욱 크고 귀한 자본이 되는 것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이럴 가리켜 대목 장날이라고 비유하였습니다. 신약시대 증거 기간과 박해 기간을 3년반 3일반으로 상징했으니 2천년가량으로 셈하면 우리 짧은 개인 일생의 해당 기간은 몇 시간이 될까? 너무도 짧은 기간은 영원에 주와 관계와 행복을 좌우하니 생존의 나의 기간이 얼마나 귀중한가?

(570300)





 
                    답변/관련 쓰기 수정/삭제     이전글 다음글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