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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참석과 설교 듣는 자세  
 

설명: 설교는 예배 시간에 인간이 표현할 수 없는 성령의 가르침으로 들어야 하는 것

그런데, 여기 와서 또 보니까 어린 교인(敎人)들은 여기 와 들어도(야) 대충 듣지, 그래도 교역자(敎役者)들이 가 가지고 얼마나 좀 새김질을 해서 가르쳐 줘야 될 터인데 여기 교역자들은 몇 명이 없습니다. 교역자 된 사람 손 한번 들어 보이소, 여기. 교역자. 그런데 교역자 몇 명 없어. 여기 녹음기 기계만 와서 있지 교역자는 없어. 나 녹음기 보고 설교하고 있어, 지금. 교역자들은 없고.
녹음기 그것을 금했다가 허락했더니만 녹음기 떡 틀어 놓고 ‘녹음기에 들었으니까, 녹음기에 들었으니 지금은 편히 쉬고 그때 가 가지고’ 기도실이니 핑계대고 가 가지고 녹음기나 틀어 놓고 자며 깨며 들어서 귀에만 익어서… 요새 영어 공부하는 거 뭐 한 마디, 한 단어를 5백 번만 들으면 저절로 안다고 하는 그거 이름 뭐이지, 그거? 그거 나왔데? 그 테이프 뭐 해 가지고, 그게 얼마, 10만 원이라든가, 15만이라든가? 그런데, 그거 틀어 놓으면 그저 뭐 자며 듣든지 나가며 듣든지 한 단어를 5백 번만 들으면 이제 귀에 익어서, 나도 ‘오케이’ 그거는 할 줄 압니다. ‘오케이.’ 하도 들어 쌓아서. 그게 아마 5백 번은 못 들었을 건데 그래도 외워진다 말이오. 그래 내가 그거 하나 주문하라 했습니다. 해서, 그거 해 놓으면, 그거 들을 시간이 있을는지 몰라도 그것 듣다 보면 그거보다는 좀 딴 게 중요하면 그거 들을 시간 없겠는데…
그거 모양으로 자면서 틀어 놓고 자꾸 들으니까 이제 귀에는 익어서 알기나 알고, 이거 가지고 교인들에게나 말해 주고 그러면 남의 복음으로, 듣는 사람들은 구원이 될는지 몰라도 자기(自己)에게는 구원이 안 될 것이고, 또 자기 구원 안 됐는데 그 밑에 듣고 교인(敎人)들이 구원 얻을 리는 만무합니다. 여기 모두 녹음기 모두 교역자요. 오늘 오전에도 보니까 전부 녹음기 틀어 놓고 다 누워 자는구먼.
또 실은 환난(患難)이 오면 이기겠다 싶은 그런, 내가 보기에 그렇게 보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안 보입니다. 뭐 과거에도 창기 모양으로 뭐 형편에 따라서 팔방미인(八方美人)으로 그렇게 살아왔는데 그게 그렇게 당장에 고쳐질 줄 압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오전에 일곱 가지 말했는데, 그거 다 죽은 겁니다. 다 죽은 거. 일곱 가지 그것이, 가정(家庭)이 하나님 앞에서 진노를 쌓아 가지고 징계를 받을 때에 그 일곱 가지에서 다 끝까지 망하고 말고, 개인(個人)도 그러하고 교회(敎會)도 그러하고 시대(時代)도 다 그렇습니다. 그 일곱 가지 속에는 생명(生命)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일곱 가지를 아무리 말해도 느끼지도 아니하고, 아예 ‘녹음기가 들으니까…’ 녹음기가 무슨 감동을 받겠소? 하나님께서는 인격(人格)에게 전했고, 예수님이 복음 전할 때에는 다른 방편을 쓰지 않았습니다. 글을 안 쓰셨소. 글을 쓰지 아니하고 꼭 입으로 말씀 전해 가지고 이렇게 했는데, 녹음기 틀어 놓고 ‘녹음기 안에 있다.’ 하고 자기는 평안하게 누워 자니, 우리 서부교회에도 보면 요새 녹음기 때문에 그만 잡니다.
이거 녹음기 없을 때에는 그래도 ‘이거 기록을 해야 나중에 가서 듣기라도 하지’ 싶어서 기록을 하니까, 기록하면서 들어도 좀 뭐이 들어가는데, 실은 그것도 재미없습니다, 필기하는 것도.
녹음기도 안 하고 필기도 안 하고 꼭 들어서 그게 우리 비(碑)에 새겨져요. 우리 마음 비에. 우리 마음 비에 딱 각(刻)해져야 되지, 그래야 내 마음이 움직일 때 그대로 움직이지, 말씀은 말씀대로 따로 있고 자기는 자기대로 따로 있고 행동은 행동대로 따로 있고 그러면 뭐이 되겠습니까?
실은 필기하는 것보다도 고 하나 하나 들어서, 인간(人間)의 방언(方言)으로 표시하는 그것은 그게 참 아주 희미한 것입니다. 인간의 방언이 옛날 요량 하면 지금 대단히 발달이 됐지마는, 사람의 말로 표현 못할 것이 세상에서도 더러 있지마는 교회의 구원도리(救援道理) 안에는 대개는 표현 못할 것들입니다. 기록하면 천하에 두어도 둘 곳이 없는 그 내용이 이 신구약(新舊約) 성경(聖經)으로 단축했는데, 그거 기록하려면, 또 기록하려면 많이 기록해야 되는 게 아니라 인간 말로는 더 기록을 못해요. 인간 말로 기록 못한 것이 기록한다면 천하에 둬도 둘 곳이 없을 만치 그렇게 많습니다.
어떤 사람이 표현을 하기를 ‘삼각(三角)이 긴 삼각이 있는데 끄트머리는 뾰족한, 날카로운 뾰족한 고거 하나뿐이지만 그 안에 들어갈수록 한 발 들어가면 더 넓고, 10리 들어가면 더 넓고 한이 없는 것처럼, 성경(聖經)은 이렇게 무한(無限)한 영감(靈感)의 도리를 인간의 방언으로 그저 하나 표시만 해 놓은 것뿐이다.’ 그렇게 묘사해서 표현했습니다.
그러니까, 자꾸 이렇게 거듭 말을 할 때에는 그 말 들으란 말 아니오. 그 말 들으란 말이 아니고, 그러는 가운데서 인간의 방언으로 표시 못할 그 속에 영감(靈感)을 받아서 깨달으라는 말입니다. 자기는 녹음해 가지고 그거면 다인 줄 알지마는 그것이 우리가 생활(生活)하려고 하면 그것의 천 배도 만 배도 넘다는 걸 우리가 환하게 아는 데, 그거 찍해야 한 가지 말하는 것이지 어디 그런 이치에 맞는 것이 한 두 가지뿐입니까? 많지요.
이러기 때문에, 들을 때에 자세히 들어서 그 이치(理致)를 외부적으로 깨닫고, 그 이치가 우리 사람과 동행할 때에 어떤 환경을 만날 것을 성령(聖靈)이 가르쳐 주실 때 그때 들어야 됩니다. ‘아, 이대로 살려고 하면 어떤 어떤 일이 있겠다. 어떤 사정 난제가 있겠다. 복잡함이 있겠다. 어떤 딱한 사정이 있겠다.’ 하는 그것을 성령이 가르쳐 주시는 그대로 자기가 자꾸 같이 받아서 깨달아 나가니까,
한 강단에서 한 가지 설교(設敎)를 했는데 앉은 사람 수백 명이면 수백 명, 수천 명이면 수천 명이 그 한 설교를 들을 때에, 자기에게는 상관도 없는 설교인데 천 명이면 천 명, 만 명이면 만 명이 각자 자기에게 있는 어려운 난제가 다 동시(同時)에 해결됩니다. ‘아, 이렇구나, 이러면 되겠구나, 저러면 되겠구나.’ 말은 한 마디 표현했지마는 그 말의 이치(理致)에 관련된 사건들은 심히 많습니다. 이러니까 각각 그 이치에 해당되는 사건을 가진 사람들은 다 거기서 해결을 다 받습니다. 해결을 다 받아요. 그게 영감(靈感) 역사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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