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전1: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이 말씀은 어떤 대상을 하나님이 인식했거나 지식했다는 말씀이 아니고 아무 것도 없을 때 하나님의 완전하신 지식만 있음을 말함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임시 조치가 아니고 하나님의 온갖 지식에서 선택하신 목적인 것을 나타냅니다. 후택설 중 '창조하다가 보니 폐물이 나왔고 폐물 이용이 우리 구원이라'는 논리를 말하나 이것은 틀린 설입니다.
'하나님의 미리 아심'이란 하나님의 완전한 지식세계에서 목적이 시발되었습니 다. 거기서 선택한 것이 교회요, 우리의 구원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하나님의 속성을 써서 일했습니다. 속성 중 의지로서 예정하고 속성의 능력으로 예정한 것을 성취하셨습니다. 목적 달성을 위해 예정된대로 창조도 하셨습니다. 후택설도 정통으로 보나, 성경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미리 아심'이란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지식 중 유일한 것으로 선택했으며 완전무결한 목적입니다. 그 근원의 권위성과 존귀성을 표시하려고 미리 아심이라고 했습니다.
'택하심'이란 하나님의 목적이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맺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 안에 있는 자들로 하나님의 선택 안에서 지음받은 자들입니다. 즉 목적 안에서 난 자들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중생 이전입니다. 그보다 지음을 받기 전입니다. ]
롬8:1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말씀했으니 과거나 현재나 미래 영원무궁토록 정죄가 없습니다. 중간 단계로 정죄와 사죄가 있었던 것이요, 하나의 정죄 없다는 것을 성립시킨 방편에 불과합니다.
'순종함과'
목적은 '순종함과'로 하나님께 순종이 믿음입니다.
순종은 능치 못하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여기 이 말씀은 베드로가 하나님을 본받고 하나님처럼 되어간다는 말씀입니다. 자체가 하나님을 따라가고 행동이 따르고 결과가 따라감을 순종이라고 했습니다.
순종을 온전히 이룬 것은 하나님과 한 덩어리가 됩니다. 그러나 신적요소는 아닙니다. 피조물입니다. 그러나 순종 곧 피동으로 하나님과 같이 거룩하여지고 성결해지고 온전해집니다. 하나님의 전체면은 아니나 그리스도면 곧 지능, 도덕면은 하나님과 같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완성은 순종함의 완성이요, 우리의 완성을 주시려고 형편과 환경을 주셔서 순종함의 완성을 이루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순종이 많음은 능력자요, 완전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옳다, 틀렸다, 죄다, 의다' 할 때에 나도 꼭 그와 같이 알고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신격성과 꼭 같이 인격성이 됨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안 되는 고민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즉 원죄성이 있으니 '선악을 아는 것이 우리 중 하나와 같다'고 하나님께서 (창3:22)에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멀리하고 싫어함이 악이요, 가까이함이 선이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완전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그렇게 할 실력이나 자격이 없는데 선악과 먹고 자기가 하나님 된 것처럼 그렇게 하니, 사망의 결과를 맺은 것입니다. 타락 후 사람들이 하나님과 같은 위치에서 자신을 중심하여 선악을 규정하는 그것이 사욕이요, 자율이요, 주관입니다. 이것이 정죄되어 형벌 받을 자입니다. 이것을 죽기 전에 자기를 부인해서 참에게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완전히 닮고 동화되고 성화되어 가야합니다.
왜 우리가 순종을 싫어하느냐? 그것은 자아가 왕이요, 자아위주요, 주관을 안 꺾으려 함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죽여야 합니다. 죽일수록 좋습니다. 이것이 자기의 전체를 복종하여 하나님에게 완전 순종하기 위함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또 목적입니다. 우리는 자기를 위하면 망합니다. 하나님을 따라 순종함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① 하나님을 연구하고 ② 자기를 연구해야 할 것입니다.
연구할 기본지식은 신구약 성경말씀과 영감입니다. 하나님을 안 것만큼 삐뚤어진 자기를 바로 알고 고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생존하신 인격자시오, 그의 의사도 진리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수입해야 하는 것은 땅위의 금이나 은이나 보배가 나의 수입이 아닙니다. 다만 순종만이 우리의 수입입니다. 나의 평가와 행사와 한 일이 하나님과 같음이 우리의 성공입니다. 우리가 진실이 모자라기 때문에 이런 좋은 진리를 배우나 행함이 없습니다. 심히 안타까와 탄식할 노릇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게 함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선택과 종자와 피의 결과를 말함입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살도록 함입니다. 생명은 보이지 않습니다. 계란 속의 생명이 병아리화되는 것 같이 우리의 구원도 이와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씨인 진리와 성령의 감동이 나를 다 먹어 그리스도화 됨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씨가 자라서 옛 사람을 삼켜야 진리의 것이 됩니다. 이 씨가 나의 소원이나 욕심이나 일을 다 먹어 삼키어져야 합니다. 진실한 자라면 누구나 다 알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잘못하면 불타고 말 집을 짓고 살기 쉽습니다. 즉 잘못 깨달아 행한 신앙은 불타게 됩니다. 그러나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지은 집은 값이 비싸서 건물이 크지 못하나 불에 타지는 않습니다.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지은 집은 쉽게 크게 건설하지만 불에 타고 맙니다. 이와 같이 자기의 공명심과 주관으로 사욕으로 하니까 잘하고 커 보이고 열심이 나오나 헛수고입니다. 주관을 죽이고 사욕을 꺾으면 열심이 안 나오나 참으로 행하면 잘되고 흥합니다. 지식은 교만케 함이 아닙니다. 참으로 바로 아는 것은 겸손해집니다. 참되게 바로 아는대로 행함이 얼마나 복이 되는지 모릅니다. 살고 싶으면 행치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행은 하나입니다. 지행일치입니다.
가르침을 받아 들어서 깨달을 때에 가르치는 자의 영감이 그에게도 있게 됩니다. 이 면에 성령의 운동이 빠릅니다. 우리의 생각도 빠릅니다. 옳은 것은 성령이 전달하고 악은 마귀가 전달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요19:30)는 말씀은 성령님에게 인계되도록 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이 인도하시리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곧 우리의 목적인데 이 목적은 두 가지로
첫째는 순종함입니다. 쉬운 곳에서 어려운 데까지 순종하고, 어떤 손익 관계에서도 순종하고, 어떤 모진 풍랑의 현실에서도 순종하고, 사형장에서도 순종하고, 하고 싶어도 못하게 하면 못하고, 하기 싫어도 하라 하면 하고, 어떤 현실, 어떤 형편에서도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분 좋을 때만 순종하는 자에게 기분 나쁠 때에도 순종시키시려고 기분 나쁜 현실을 만들어 주십니다. 여기에서 실패하면 그런 현실들을 자꾸 만들어주어 시험을 치르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난에서도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내게 원치 않는 것이 자꾸 오는 것은 그것에게 순종치 않기 때문입니다. 원치 않는 것이 왔을 때에도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곳에서 순종하면 하나님도 다른 시킬 것이 많고 마귀도 그런 사람은 순종하니 그런 것을 못 주게 하고 있습니다.
왜? 주면 제게 자꾸 손해이니까 그렇습니다. 마귀도 연단받은 성도를 어서 데려가라고 합니다. 다 내어놓고 실행해서 살면 승리하게 되고 마귀는 손해보고 맙니다. 그러므로 손익간에 생사간에 순종하려는 자는 마귀가 함부로 하지 못하고 두려워 떨게 됩니다. 마귀가 가장 무서워하는 자는 무릎 꿇고 하나님과 의논하는, 기도하는 자입니다. 주체가 누구냐? 를 찾고 손익간에 생사간에 물론하고 이것을 하나님과 의논하는 자는 마귀가 무서워하고 떱니다. 우리가 진리와 영감에 순종함이 우리 수입입니다. 마귀가 잘 알고 있습니다. 제게 손해갈 일 안 합니다. 기독자가 믿음직하면 제게 손해이니 지킬 것 같이 보이면 달아납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예수님의 피와 살은 우리의 인격의 양식이 됩니다. 예수님의 피와 살의 어떠함의 이력, 방편을 양식 삼아 먹으면 살게되고, 또 진리와 영감을 양식으로 삼아 먹으면 살게됩니다. 땅위에 옳은 것은 예수님 한 분뿐이십니다. 이것을 명심하자!
하나님의 목적 중 둘째인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는 것' 세 가지는
① 예수님의 공로를 힘입는 것입니다. 공로를 힘입어 사죄와 칭의를 힘입고 하나님과 결합되고 진리와 결합되고 하늘에 속한 신령한 것을 기업으로 삼고 하나님의 모든 면에 연결됨이 곧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것이요, 예수님의 공로를 힘입는 것입니다.
②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이란 예수님의 종자를 심는다는 말입니다. 종자가 싹터서 자라 꽃피고 열매 맺으면 예수님의 삶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삶의 첫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으로 나타나지 아니하시고, 양보하고 하나님과 타를 위해 낮아지고 타인이 못하는 것을 자신이 하고 하나님과 타인를 기쁘게 하려고 자신이 자원하여 사신 것이 예수님의 일생이십니다. 예수님의 이 종자를 심으면 이 종자의 열매가 나옵니다. 이것이 성령님의 권능입니다. 예수님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이 우리의 권능입니다. 열매는 예수님이 필요 있게, 높이 쓰임같이 우리가 그렇게 쓰임받는 것이 열매 맺음입니다.
③ 피 뿌림이란 종자를 예수님의 종자를 받아 심어 결실을 맺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의 종자를 받은 자는 순종하면 됩니다. 즉 믿으면 됩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이 바꾸는 것입니다. 이 사망의 세계에서 생명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성화입니다.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약한 것이 강한 것으로, 이사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중생된 영이 주체가 되어 사는 것이 이세상의 생애입니다. 자기가 가진 전부를 하늘나라로 이사시킵니다. 모든 멸망의 것이 생명과 평강의 영생의 것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나그네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세상을 나그네로 시작했다가 본토로 주저앉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기독자가 왜 힘이 없느냐? 신앙의 인격이 강해지면 담대하고 용감해집니다. 우리 기독자가 왜 기쁨이 없느냐? 그것은 얻어보지 않았기에, 먹어보지 않았기에 그렇습니다. 안 먹었다는 것은 인격은 진리와 영감을 먹는데 곧 진리와 영감의 인도대로 쓴 고비를 넘겨보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마음과 행동의 믿음이 어려운 고비를 넘겨야 합니다. 신앙양심을 살려서 투쟁을 시켜 승리하게 되면 기쁨과 힘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먹어보아야 맛을 압니다. 즉 실행해 보아야 힘이 나옵니다. 어려운 고비를 믿음으로 넘겨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기쁨이 넘치고 힘이 솟구치고 평안이 찾아옵니다. 이 맛을 본 자가 앞으로 더 큰 어려움을 만난다 할지라도 기쁨으로 믿음에 나아가게 됩니다.
왜? 믿음의 맛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믿음에서 믿음으로 나아가게 된다고 말합니다. 즉 지극히 작은 것에 순종해보면 지극히 큰 것에도 순종에 나아가게 됩니다. 그것은 순종의 수입을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무디 목사님도 '믿음보다 더 큰 수입은 없다'고 말했고, 베드로는 '보배로운 믿음'이라고 말했습니다. 믿음은 참 보배다. 마귀는 얼마나 많은 방편으로 우리의 믿음을 못 지키게 하려고 방해하는지 모릅니다.
굳센 믿음의 사람이 되려면 믿음의 시련을 많이 겪어야 합니다. 우리는 땅위의 무엇으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 성도에게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시험을 주어 통과하게 하는 것은 어떤 어려움을 당해도 믿음을 계속하는 인내의 믿음이 만들어져 하나님에게 피동이 요동되지 않는 자 되고, 그러면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함이라고 말씀(약1:2-4)했습니다.
우리가 노리는 수입은 세상이 모르는 수입입니다. 세상이 비판할 줄 알고 지식할 줄 알고 평가할 줄 아는 것은 다 예수 밖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우리가 가치로 알고 취할만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 세상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구원을 이루고난 다음에는 버릴 찌끼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수입할 진짜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과 자기가 하나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식과 나의 지식이 하나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수입이니 세상은 이것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이 나그네인 줄 알고 살아야 합니다.
나의 목적은 믿음이라야 하고 내가 자라갈 것은 하나님의 종자요, 순종은 하나님과 진리에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 원수 앞에 나아가 죽지 말고 원수가 무엇인지 자기부터 살펴 찾아야 합니다. 자기를 실평 정가해야 합니다. 잊었던 자기를 찾아야 합니다. 이것은 알기 쉽고 단순합니다. 자기를 단속해야 합니다. 옛 사람이 주체됨이 깨어져야 합니다. 깨어지면 전부를 바로 알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세상으로 잠자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에게 있는 모든 주관으로 사는 것이 옛 사람으로 잠자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이 세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피 뿌림을 받은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종자를 이미 받았으니 예수님에게까지 자라가야 합니다. (엡4:13) 여기에 도달할 수 있는 자질을 이미 받아 가진 자들입니다. 하나님과 진리와 자기가 대립하여 왕 다툼하지 말고 하나님께 주권을 양보하고, 옳은 것에게 나를 양보하는 것을 연습하여 믿음을 길러가고, 인인관계에 있어서는 나와 형제가 다 같이 옳아도 내가 그 형제에게 순종하겠다고 함이 사람을 얻는 방식입니다. 또 아무리 존경하는 자일지라도 나는 양보할 수 있으나 옳은 것은 배척할 수 없으니 사람을 배척할지라도 옳은 것은 바로 가지는 것이 우리의 걸음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복되게, 유익되게, 좋게 하려는 이것을 연습하고 여기에 이용당함에 나의 모든 것이 다 쓰여져 이루어가야 합니다. 자기를 여기에 다 쓰는 이것이 생명법입니다.
가치적으로 물질보다는 사람이 탁월하게 높고, 그러므로 물질 손익관계보다는 인인관계인 도덕관계가 더 높습니다. 또 사람보다는 진리가 더 탁월하게 높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옳은 것에게 이용되고, 이웃의 행복을 위해 이용되는 것이 얼마나 복인지 모릅니다. 이렇게 알고 행하는 자는 참 복이 있는 자입니다. 사람들이 어두움에 미혹되어 이것을 알지 못합니다. 하늘나라는 내려감으로 올라가는 나라입니다. 올라갈 수 있는 힘을 두고서 자중하고 상대방을 세우면 반드시 내려간 것만큼 높아집니다. 다른 것들이 그를 들어올립니다. 물질들도 이용당함이 많으면 귀중하고 이용당함이 없으면 버림받습니다. 사람은 더욱 더 그러합니다. 불의에 이용당하지 말고 의에 이용당하여야 합니다.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
'은혜'는 값없이 공짜로 받는 것이 은혜인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원한 것으로 준 것이 다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이 은혜는 특수은혜를 중심한 말씀입니다.
'평강'은 세상이 모르는 평강입니다. 이 평강은 종류가 많습니다. 평강이라고 하면 저 혼자가 아니고 모든 존재가 다 같이 평강한 것입니다. 시간, 공간, 종별 전체와 함께 하는 평강이라야 합니다. 그러므로 평가적인 평강입니다. 그러므로 비유컨데 '은혜'는 건설에 드는 모든 재료들이요, '평강'은 건설해 놓고 누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자에게 이런 은혜와 평강이 있는가? 나그네로 사는 자에게 있습니다. 순종으로 산 것만큼, 피 뿌림을 받은 것만큼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자가 평안을 구하려거든 나그네인 것을 확실히 인식하라! 나그네인 것을 확실히 인식하여 은혜와 평강을 충만히 받아 가지라! 은혜와 평강을 받아 예수의 증인이 되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생애를 자기 몸에 채우게 되면 이 은헤와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은혜와 평강을 진리와 영감의 인도를 따라 순종함으로 광범위하게 다방면으로 구비하여야 합니다.
성경의 성문의지는 다 강령입니다. 세포적인 것은 은밀의지입니다. 이것을 인간의 방언으로 다 표현 못합니다. 또 다 기록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이 현실마다 알려 주십니다.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려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야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다 하면 점차적으로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핑계하지 못합니다.
엡1:2하반절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한 이것은 신인양성일위가 된 평강입니다. 격투의 평강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나와 합치로 온 평강입니다. 우리의 평강은 사람으로 시작하여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람이니 지능과 도덕이 자람으로 누리는 평강이라야 합니다. 즉 예수님의 공로를 힘입음으로 된 평강입니다. 우리는 지식도 사람도 주체를 바꾸어야 합니다. 자기부터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참에게 바쳐서, 옳은 것에게 감염되어 진리화되고 신화되어 오는 평강입니다.
(71050420)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감리교는 예지예택론입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될 것을 알고 택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미리 아시고'는 하나님의 지식 안에 있는 것을 말씀하심입니다. 어떤 존재가 있었다는 말씀이 아니라 창조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첫째가 하나님의 목적이요 즉 영원전 하나님의 선택이요 그 다음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한 예정이요 그 다음은 예정대로 창조요 그 다음은 인류의 타락이요 그 다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요 그 다음은 타락한 택자에게 그리스도의 구속 적용이요 그 다음은 성화요 그 다음은 영화로 이어집니다.
'미리 아심'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나오기 전의 토막을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지식세계 안에 있는 것을 가리켜서 미리 아심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식 속에 선택의 목적이 들어있고 또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예정이 들어있습니다. 이 목적 달성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성취됩니다.
그러므로 '미리 아심'이란 우리를 안다고 함이 아니라 우리는 그 때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지식에서 하나님의 목적이 서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예정이나 목적 가운데가 아니고 하나님의 완전한 지식 속에서 목적을 정하셨습니다.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① 순종함과 ②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는 목적 전 우리의 구원을 책임지신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지식 안에서 이 목적과 함께 나타났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대속의 피 뿌림은 영원전입니다. (벧전1:20 참조)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지식 안에서 시발된 구원입니다. 그 지식 안에서 목적을 정했습니다. 그 목적 안에서 예정 창조되어 우리가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인데 분석하면 ① 순종함과 ② 피 뿌림을 얻기 위해 택하심을 입었습니다.
우리는 그 목적 안에 존재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지식세계에서 선택한 이 목적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시발되었고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의지 활동의 시발의 이차가 예정이요, 다음은 창조요, 그 다음은 그리스도의 구속입니다. 이는 다 하나님의 지식 안에서 순서적으로 배정된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위의 두 가지는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목적하신 목적 안에서 우리를 낳고 이 목적은 두 가지니 ① 순종함과 ② 피 뿌림을 얻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목적의 한 분자가 우리인데 우리를 구속하신 목적이 무엇이냐? 둘이니 곧 순종함과 피 뿌림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목적이 바로 우리 목적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목적대로 내가 만들어지는 것이 나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모든 것이 다 있는데 당신의 의지에 분담되고 의지에 분담된 것이 예정으로 나타나고 그 예정이 창조로, 섭리로 나타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세계에서 살고 있으니 이 하나님의 섭리 이면에는 하나님의 의지 위치가 있고 그 의지 안에는 하나님의 판정위치가 있고 그 안에 하나님의 지식이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이 지식에서 시발되었습니다. 이 지식에서 정한 것이 목적이니 곧 우리의 구원이요, 나의 목적입니다. 나의 구원 달성이 하나님의 목적 달성입니다. 즉 ① 순종함과 ② 피 뿌림입니다.
하나님의 목적 중 첫째는, '순종함과'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완전하시고 불변하시고 단일의 하나님이신데 완전자이신 하나님이 움직이는 그대로 정확히 꼭 같이 움직이는 것을 만들고자 하심이 하나님의 목적이요 곧 우리의 구원입니다. 완전자에게 완전 피동은 완전자가 되었으니 창조주가 아닌 피조물로서 제 이의 하나님을 만들고자 하심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모르고 죽는 죽음은 가치가 없습니다. 기독자가 일반적인 죽음으로 죽는 것은 가치가 없습니다. 생명으로 옮기기 위해 하나님께 순종으로 죽는 것이 우리의 참 삶입니다. 이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나그네의 삶인 것을 알아야 이 비밀이 깨달아집니다.
하나님은 완전자이신데 '순종함과' 하나님은 당신에게 순종하는 완전자를 만들어보려는 것이니 하나님의 피조물인 우리를 목적으로 삼아 하나님으로 인해서 하나님 노릇을 하도록 하려고 선택한 하나님의 목적이십니다. 이 일은 어느 누구도 할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거룩'
성령은 하나님이신데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보다, 보다 구별하고, 구별하여 유일한 완전자로 만들므로 완전자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구별하여 하나만 되는 완전에 도달하는 역사를 성령이 책임지고 하시니 하나님의 지체, 하나님의 몸, 완전자 당신이(성경에 그리스도의 몸이라 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신성의 이름) 당신의 수족으로, 몸으로 만드시려하심이 하나님의 지식 안에서 정하신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목적 중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피 뿌림을 위하여'란 피는 마지막 절정이니 피 뿌림은 ① 예수님의 공로를 힘입는 데서 시작해서 ② 예수님의 피 공로를 심고 ③ 결과를 맺게 하는 이 셋을 가리켜 피 뿌림을 얻는다고 말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도덕과 지식, 지혜와 능력의 완전직을 가리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란 예수로 시작해서 그리스도에게 도달되는 단계를 말함으로 성장의 방편 순서를 가리켜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신성인 하나님이시니 예수님의 인성과 접촉한 우리의 인성에서 시작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에 도달되는 여기까지 나아가는 이 성공을 가리켜서 피 뿌림을 얻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피로 종자를 심고 열매를 맺습니다. (여기 피 뿌림은 사죄 칭의가 아닙니다)
'피 뿌림'
'피 뿌림'이란 삼대 순서이니
①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는 데서 시작해서
② 예수님의 피를 우리에게 심고 예수님의 피란 예수님의 인격행위의 최종적인 표시를 가리켜 피라 말함이니 그의 인격의 생애에 심습니다. 즉 그 영감의 희생과 충성을 예수 그리스도로 씨를 심는다는 말씀입니다. 한 알의 밀을 심는 것과 같습니다. 시작은 피를 힘입고, 심고
③ 결실(結實)을 맺어 예수 그리스도와 꼭 같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순종 곧 완전자에게 순종, 피동을 했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제 이의 예수 그리스도를 만드시려 하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인성에서 시작하여 신성에 도달하는 것인데 피는 외부의 표상으로 말함이니 십자가의 죽으심은 우리의 대속을 위함이니 이 일의 완성이 십자가의 공로이니 이것이 다 이룬 것으로 이것의 종자 곧 승리의 종자, 이력의 종자로 우리에게 심어 열매를 맺게 하여 제 이의 예수 그리스도가 순종으로 되게 함으로(독단이 아님) 하나만 되는 완전자에 도달케 함으로(거룩하게 하심으로) 살 자이니 이 세상은 이런 자를 만드는 나그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서 살 세계는, 우리의 본향은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진리와 영감의 인도로 하나님의 창조물을 다 써서 일하고 계시는 것은 우리를 하나님에게 완전히 피동되는 자로 익숙해지도록 기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전심전력을 기울여서 우리로 순종을 연습시키고 기르고 계신다. 우리로 순종시키시니 우리의 단독행위는 절단나고, 점점 줄어들고, 약해지고, 작아져 가고, 없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디에 순종하는 것인가? 하나님 한 분에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심전력을 기울여서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자 되게 하려하고 연습시켜 실력있는 순종자가 되게 하려 하십니다.
(71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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