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세기 22장
(아브라함의 실수와 회개)
22: 1∼24절에. 아브라함에게 최종적이요 최대적인 시험이 왔습니다. 이것은 백세에 얻은 독자를 번제물로 하나님이 요구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무서운 명령이 떨어졌으나 아브라함은 도리어 기쁨이 되었고, 두렵지 아니했습니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은 과거에 많은 신앙 체험과 경험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것에 대하여서는 한번도 손해되는 것이 없고 작고 크고 간에 모두가 합동하여 유익한 것을 순종 경험을 통해서 얻은 지식이 있었음으로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시는 명령이 아브라함에게는 큰 축복인 줄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번제로 드리는 일에 있어서 번제로 드리는 것도 어렵지마는 이것보다 하나님의 지성과 지공에 만족하실 수 있는 번제로 드리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만족하실 수 있는 번제를 드렸으니 드리게 된 방편은 어떠합니까?
① 하나님에게 번제를 드리되 억지로 드리는 것이 아니고 간절한 마음으로 드리고자 했습니다.
② 하나님에게 번제를 간절한 마음으로 드리되 힘을 좀 더 많이 들여서 더 정성되게 드리기를 원했습니다.
③ 제사 드림에 있어서 순서를 진행할 때에 이미 깨달은 순서는 심신으로 정성되게 행하고 하나님에게 대한 간절한 경외심과 성심성의의 착한 양심은 이미 실행하고 있는 거기에 있지 않고 앞서 질러가서 현재에 행하는 순서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을 궁구함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선한 양심은 행해야 할 일을 봉착하기 전에 미래적인 것으로 궁구하였기 때문에 미래적인 영감이 아브라함을 가르쳐 주셨으므로 모든 행사가 임시적이거나 돌발적인 것이 아니었고 전부 준비적이요, 대망적이었기 때문에 사탄의 궤계를 전부 막아 버렸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어 잘 감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도 이런 성질의 신앙 걸음이 승리의 신앙 걸음입니다. 성공의 신앙 걸음입니다.
(주해공과)
‘보자, 이삭을 더 좋아하나, 날 더 좋아하나 보자.’ 이래 가지고, ‘아브라함아!’ ‘예.’ ‘이삭을 잡아서 제사를 드려라.’ ‘아이쿠, 하나님에게 이렇게 순종(順從)하니까 100살 먹은, 100세가 넘은 나에게 아들 주셨는데 또 하나님에게 순종하면, 이삭을 잡아서 제사 드리면 이거 죽었다가 살아나는 신기한 일이 있겠구나.’
죽었다가 살아날 걸 어찌 알았소? 이삭으로 말미암아 그 혈육 자손이 난다 했으니까 뭐 재가 아이 낳지는 못할 거고 그러니까 죽었다가 살아나야 될 것 아닙니까? 전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데에서 막 그만 역사(歷史)를 다 꿰뚫고 나가는 거라.
이래 가지고 좋아서, 이삭을 주신 하나님이니까 더 좋아서, 더 좋게 해 줄 줄 알고,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약속의 신실을 믿고 그만 잠이 안 옵니다. 밤에 밤새도록 잠을 안 자. 아들 죽을까 싶어서? 하나님이 번제로 드리라 하니까, 하나님이 요구하시니, 이분 대접(待接)을 하려고 해도 대접할 기회가 없는데 요구하시니까 어떻게 좋은지! 또 하나님이 그렇게 명령대로 순종(順從)하면 더 좋은 것 주시는 줄 알고.
그래 이삭을 제단에서 번제물(燔祭物)로 드렸습니다. 번제물로 드리니까 하나님께서, 잡으려 할 때에 ‘손대지 말아라!’ 이래 가지고 다른 짐승으로 대신 제사하게 하고, 그때에 이삭에게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하니까 하나님이 또 두 가지 줬습니다. 또 신령(神靈)한 것과 또 이 세상(世上)에 있는 것과 두 가지 줬소. 뭐 뭐 두 가지 줬습니까? 뭐 뭐 두 가지 줬지요?
신령한 것 준 것은, 이삭에게 이삭으로 인해서 만민(萬民)의 구주(救主)가 그 계통(系統)에서 나와 만민을 구원하는 구원의 기관으로 이삭을 딱 약정해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육적으로서는 이삭을 살려 이삭에게서 그 혈육(血肉)의 자손(子孫)이 나게 했습니다. 혈육의 자손이 나게 한 것은 또 거기 또 시험이 있었소
*히브리서 11: 17-19
(80050841 집회) 5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것은 백 세에 외동 아들을 낳아 놨으니까 그 한 열 두서너 살 먹었으니까 얼마나 귀엽겠습니까? 또 순종하고 그러니까 아주 귀여워서 하나님 보시기에 거게다가 마음을 기울이고 또 늘 애정을 기울이고 늘 사모하고 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대해서는 좀 등한히 하고 그리 마음이 기울여지고 마음이 그리 가서 붙는 거같이 그렇게 여겨 질 만한 그런 형편이 된 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했습니다.
시험하되, 네가 그 이삭 독자 백 세의 독자 이삭을 네가 사랑하고 애모 하므로 내게 대한 애모와 성의가 성글다 그리하지 말아라 그렇게 하시지 아니하시고, 이삭을 잡아서 번제로 드리라 이삭을 잡아서 불에 태워서 제사로 드리라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럴 때에 만일 아브라함이 참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하나님이 나에게 어떻게 이렇게 백 세에 낳은 독자를 잡아서 불에 태워 -번제라 말은 불에 태워서 제사 드리는 것이 번제입니다. -이렇게 화제를 드리라고 이렇게 하는가 거게 대해서 조그만치라도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에 불만스러웠거나 불평스러웠거나 원망스러웠거나 그 일이 달갑지 아니했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그 이삭을 그렇게 화제로 드리라고 했지만 제가 달갑지 안한 마음 가지고 화제로 드릴라고 하면 하나님이 네 마음에 백 세의 독자기 때문에 아깝고 그렇게 그러니 그만 내비둬라 그렇게 말씀했을 것이오. 다른 데 모든 것을 보면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실 분이십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좋아서 예, 감사합니다 하고 그것으로 끝났을 것이요. 다시는 하나님이 이삭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 보기에는 그렇게 쉽겠고. 또 아브라함도 사람이기 때문에 잘못하면 그렇게 기울여지기 쉬울 수 있는 그런 형편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소원과 이삭과 그 비중을 비교할 때에 그 뭐 이삭에 대한 아브라함의 마음에 기울이는 성의의 비중이 만일 비유컨댄 만 근이라고 하면 이삭에 대한 것은 한 근도 안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번제로 드릴려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천사를 보내서 아브라함아 이제야 네가 나를 어디서 어디까지 나를 숭배하고 높이고 섬기고 두려워하고 모든 것이 내게 주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내가 알았다. 이제야 네가 나를 참 지극히 크신 분으로 인정하는 것을 알았다. 이러니까 그 이삭을 해하지 말고 그 옆에 있는 양으로 번제를 드리라고 즉시 하나님이 이삭에게 작정하신 축복을 다 축복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류의 구주가 되는 그 구주의 바로 선조가 돼서 그를 통해서 그 씨로 통해서 메시야가 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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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보다 하나님을 중하게 여겨서 하나님과 자기와의 그 비중 이 비교되는 그런 일이 퍼뜩 오면 아브라함처럼, 아브라함은 그 말을 듣고 근심하지 안했고 '예, 감사합니다.' 하고는 가만히 생각하니 밤새껏 뭐 장작을 백지 패는데 장작 그 뭐 사람 하나 태우는 거 좀 많이 들기야 들지만 지고 갈려고 하면 얼마나 많이 가질 수가 있겠습니까? 많이 가지지도 못 할 거고, 이러니까 잠깐 패지만 그 돼는 걸 또 돼 가지고 새로 더 잘 타도록 또 그런 걸 또 가리고 또 그것을 아주 잘 쪼개고 정성을 들여서 자꾸 화목을 쪼개는 그것이 뭐이냐? 주님이 그 번제로 드리라는 그 명령이 떨어진 이후 단 마음으로 순종하는 그 순종하는 것으로 계속하고 순종하는 것을 '예' 해 놓고 허툴이 다문 밤이라도 한 시간이라도 그 단마음으로 순종하고 고것을 중단하지 아니하려는 그 아브라함의 신앙이었다 하는 것을 자꾸 생각해 보면 나옵니다.
*히브리서 11: 17-19
(8405060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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