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찬송가도 한 번 하고 두 번 하면 재미가 적고 또 세 번 거듭 찬송하면 재미가 적어서 찬송 소리가 차차 작아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 무슨 연고인가? 찬송 안에 들어 있는 가사의 내용을 생각지 안하고 껍데기 그 곡음에만, 곡과 소리 그 곡음에만 치중하고 속에 들어 있는 그 찬송이 나타내고 있는 그 뜻을 그 사람이 생각지 않기 때문에 외식으로 말미암아 그와 같이 된 것입니다.
또 그 정도를 넘어서 찬송을 한번 하니까 더 은혜가 되고 두 번 하니까 더 은혜가 되고 세 번 하니까 더 은혜가 되고 그저 밤새껏 그 찬송을 하니까 더 은혜가 되는 것은 찬송하는 가운데에 그 곡과 음이라는 그 곡음은 어찌 됐는지 그만 저절로 되고, 곡음에 대해서는 관심을 하나도 가지지 안 하고, 안 가질라 해서 안 가지는 것이 아니라 곡음에 대해서는 고만 자연히 관심을 가지지 안하게 되고 그 찬송의 뜻의 내용을 자기가 생각하면서 찬송을 하니까 찬송이 해 갈수록 자기에게 깨달음의 주관적 깨달음이 있으니까 그 주관적인 기쁨도, 또 열심도 확신도 생겨지는 것이고, 또 그 정도를 넘어서 자꾸 그 뜻을 생각하면서 그 뜻과 자기와 일치가 되도록, 그 찬송의 뜻과 자기와 일치가 되도록 해서, 찬송 가사의 뜻과 자기 주관이라는 그 자기라는 것이 일치가 되어 가지고 찬송을 이렇게 하니까 이제는 차차 차차 샛별이 떠 올라서 그 찬송을 받으시는 하나님과 자기와의 연결이 되어 하늘에서부터 자기에게 비춰 주시는 빛이 있어서 자기 주관적인 깨달음 만 아니라 객관의 그 성신의 깨달음의 도우심이 자기에게 건너오고. 또 그 빛이 건너오니까 자기도 차차 더 보여서 처음에는 무심히 찬송했는데 자기의 외식인 것도 보니까 외식을 자꾸 피해서 진실되이 하고. 또 찬송하는데 자꾸 성령님이 빛으로 비추어 주시니까 자꾸 자기의 부족한 것이 이제 나와서 자꾸 굴하고 회개를 하면서 찬송을 하고, 또 성령님이 빛을 계속해서 비추어 주시니까 자기에게 대한 그 회개의 고개를 넘으니까 소망이 자기에게 생겨지고, 소망으로 인해서 이제는 기쁘고 즐겁고 담대함으로 찬송을 하니까 그 다음에는 능력이 와 가지고서 역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빌립보 교회에서 사도 바울이 그 어려움을 당해 가지고 그 옥중에 여러 모로 착고에 채여 가지고 깊은 옥속에 지금 갇히어 있는데, 거기에서 찬송을 이렇게 하는데 자기가 기도하는 가운데에서 찬송이 타져 그왔으니까 그 기도로써 고만 벌써 곡음에다가 치중했던 그것은 벌써 초월 했습니다. 지나갔습니다. 이 찬송가의 곡이라든지 음이라는 것은 무엇을 위해서 있는 거라 그 곡이 우리에게 필요 없고 음이 우리에게 픽요 없습니다. 그런데 그 음과 곡은 그 속에 있는 가사의 뜻을 우리에게 더 알려 주고 우리의 그 감정에 더 느끼게 하고 더 깨닫게 하게 해서 가사의 내용을 우리로 하여금 알고 느끼는 데에, 감상하는 데에 돕는 역사를 하는 것이 고것이 찬송가 곡이요 소리입니다.
그러기에, 은혜가 와 가지고서 찬송을 할 때에, 혼자 하든지 혹은 단체로 하든지 해서 그 경험을 해 봤다면 알 것입니다. 은혜가 와서 찬송하기 시작하면 그 찬송가의 곡이 어떻게 됐는지 그거 모르나 그 찬송가의 곡과 같은 곡이 되어지고 그 작곡한 사람이 참으로 기도 가운데에서 작곡을 잘 한 사람이라면 은혜가 와 가지고 영감으로 찬송할 때에 그 때에 그 영감으로 찬송하는 사람이 생각지도 안했는데 나오는 그 작곡과 그 작곡 해서 찬송가에 기록해 놓은 그 곡이 같이 되어지고 어떤 찬송은 얼토 당토 안합니다. 그때에 은혜 받아 가지고 자기가 찬송할 때에 나오는 그 곡과 작곡 한 사람의 그 곡과는 아주 그거는 아무것도 아닌 그렇게 고 아주 인간 임의적으로, 인간 기술로, 인본으로만 해 놓은 것 있고, 바로 된 것은 은혜가 오면 그 곡이 자연히 되어지고, 또 그 가사를 보지 안하고 그 찬송을 처음에 이렇게 해도 찬송 못할 찬송이 없습니다. 다 곡이 됩니다. 그거는 아마 여러분들도 많이 경험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84050930집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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