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것이'
그러면 죽도록 우리가 지금 힘을 쓰는 것은 우리가 벗으려 함이 아니고 덧입고자 함이니 곧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신 죽을 것은 뭐입니까? 첫째 아담의 자손은 다 죽을 것들이고 멸해질 것들이라, 완전성이 아닌 것들인데 이런 것이 완전에게 삼켜져서 완전의 것이 돼서 이제는 영원히 완전 속에 들었고 완전으로 말미암아 살려 하는 것이라 하는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89052760)
'우리가 짐 진 것같이'
고칠 것이 얼마든지 많이 있는데 죽는 날까지 고쳐도 고칠 것이 남아 있는데 죽는 날까지 언행심사의 행위가 병든 것 고치고 사람병 든 것 고치는 여기에 급급해서 여기에 갈급하기를, 무거운 짐은 처음에 질 때보다 갈수록 더 무거운 것처럼 더 마음이 눌려지는 이것이 기독자입니다.
(79081420)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짐은 질수록 무거워지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이제 세상 것처럼 갈수록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이 아니고 갈수록 자꾸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입니다. 잘못된 것을 바로 고쳐야겠다는 짐이 갈수록 무거워집니다.
(88030120)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장막에 있다 말은, 요새 우리는 천막 친다고 하는데 '이 천막에 있는 우리가' 그말 한가지입니다. 장막에 있다 말은 벽 막고 기둥 세우고 이렇게 튼튼한 집이 아니고 베쪼가리로나 혹은 풀로나 이어 가지고 임시 움막 모양으로 그래 지어 놓고 있는 그게 장막입니다. 집이 아닌 천막 생활 그런 것이 곧 장막입니다.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장막에 있는 우리라 말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마음의 집 고기덩어리의 집, 영이 우리인데 영이 마음 속에서 마음을 집을 삼아 가지고 마음 속에 거처하고 있고, 또 몸을 집을 삼아 가지고 몸 속에 거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디 거처하고 계시는가? 하나님은 우리 영 속에 거처를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과 몸, 또 이 세상에 모든 자기 환경, 주위, 분위기, 자기의 모든 세상 이런 것을 가리켜서 여기 장막으로 비유했습니다.
자기가 첫째는 마음 속에 거처하고 있고, 몸 속에 거처하고 있고, 또 자기 방 안에 거처하고 있고, 또 자기 집 안에 거처하고 있고, 또 그 다음에는 자기 울장, 담장 안에 거처하고 있고, 자기 동리에 거처하고 있고, 자기 사회에 거처하고 있고, 자기 군에, 시에, 한국에 거처하고 있고, 또 동양에 거처하고 있고, 이 지구상에 거처하고 있고 그 밖에는 우주라는 커다란 처소입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서 여기 '장막에 있는 우리가' 장막이라 말했습니다.
장막은 불완전한 집이요 또 오랫동안 살 것 같으면 집을 만들 터인데 오늘 이사 갈지 내일 이사 갈지 모를 때에 장막을 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목축 생활을 하기 때문에 오늘 이 골짝에서 장막 치고 짐승을 먹이다가 또 거기 풀이 없으면 내일은 장막을 저 골짝으로 뜯어 옮겨 가지고 또 풀을 먹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장막이라 하는 것은 자꾸 뜯어 옮기는 것이 장막이요, 고정된 처소가 아닌 것을 장막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이 장막에 있는 우리라,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것은 장막으로 비유했습니다. 왜? 오늘 그것이 끝날지 모른다 그말입니다. 오늘 끝날는지 내일 끝날는지 모르는 아무런 안전성이 없는 그런 이 세상 자기 세상을 가리켜서 장막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짐진 것같이 탄식한다, 탄식은 안될 때에 탄식이 나오는 것입니다. 잘됐을 때에는 그 사람은 참 행복이다, 만족이다 하고 흥이 나오고, 잘될 때에는 기쁨과 흥이 나오고 잘 못됐을 때에는 탄식이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쨌든지 기쁘게 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여기는 '우리가 짐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그러면, 성령의 사람들은 기쁨보다도 탄식이 늘 계속되는 그것이 믿는 사람들입니다. 언제는 또 항상 기뻐하라 하더니마는 또 여기는 또 탄식하는 것이 믿는 사람들이라 그렇게 말하는가? 항상 기뻐하라는 기쁨은 탄식하는 그 탄식으로 인해서 탄식 고개를 넘어 가지고 오는 기쁨 그 기쁨을 가져야 되지 탄식도 없이 막 바로 기쁘다고 하는 그 기쁨은 다 자살 행위입니다. 그거는 다 못쓸 행위입니다. 탄식을 하면 탄식 속에 기쁨이 있습니다.
탄식은 뭐인가? 탄식은, 잘못됐을 때 탄식입니다. 뭐이 잘못됐기 때문에? 잘못된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성경대로 지식이 갖추어지지 못했습니다. 성경대로 행위하지 못했습니다. 성경대로의 사람이 되지를 못했습니다. 오늘 종일도 밤에 계산하고 보니까 성경 지식을 떠나서 마귀 그놈 지식에게 끌려 가지고 살았습니다. 마귀에게 끌린 행동 했습니다. 마귀와 같은 사람으로 살았지 하나님과 같은 사람으로 살지 못했습니다. 이러니까 옳은 것을 다 실패하고 잘못된 그것을 발견하고 보니까 탄식이 된다 말입니다.
그러면, 이 시간에 잘못된 것을 깨달아서 탄식을 하고 탄식함으로써, '앞으로 내가 어떻게 해 보겠다' 하는 그 탄식에서 겸손한 결심과 각오가 나오고, 결심과 각오가 나와 가지고 힘써 일해서 됐다 싶었는데 또 생각해 보니까 '이 점이 또 미비하고 또 잘못됐다' 또 탄식이 꼬리를 물고 들어옵니다.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이래서, '우리가 짐진 것같이 탄식한다' 그러면 짐진 것 같은 탄식, 짐진 것 같은 탄식은 이 탄식이 있어 갈수록 더 무거운 탄식이 되는 것입니까 가벼워지는 것입니까? 짐진 것은 처음보다도 갈수록 무거워지는 것입니다. '짐진 거와 같이 탄식하는 것은' 그 말은 그 탄식이 갈수록 자꾸 탄식이 많아집니다. 탄식이 더 많아지고 탄식이 더 커지고 그 탄식이 내 마음을 더 누르고 있습니다. 요것이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탄식에 마음이 눌린 것은 벌써 이 세상에 장막 생활, 오늘 벗을지 내일 벗을지 모르는 땅에 있는 장막 생활 그것에 갈급해서, 그것이 부요하지 못해서, 그것을 더 많이 가지지 못해서 나오는 탄식이 아닙니다. 이 탄식은 영원한 하늘나라의 온전한 그것이 현실에서 이루어야 될 터인데, 온전하고 깨끗하고 가치 있고 없어지지 않고 죽지 않는 옳은 것 그것은 하려고 해도 안 되고 엉뚱한 원치 않는 자꾸 죄가 되어집니다. 원하는 의는 이루어지지 않고 원치 않는 죄가 되어집니다. 이러니까 마음이 눌리고 자꾸 탄식이 되어집니다. 그 탄식이 갈수록 자꾸 마음이 더 눌려집니다. 이렇게 탄식을 하고 근심 걱정을 해서 근심 걱정 탄식한 고 끝에는, 참으로 탄식을 하고 근심 걱정한 고 끝에는 든든하다 안심이다 하는 기쁨이 거기서 움터 올라옵니다. 요것이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돼야 됩니다.
직장에 가면은 내가 과거 이 직장에서 인인 관계를 할 때에 남의 눈가림 하고 남의 눈만 맞춰서 살았고, 눈만 속이는 일 했고, 또 내가 일할 때에 양심에 참 후회 없는 그런 생활을 해 보지 못했고, 또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주님을 잊어버리지 아니하고 주님을 사모하면서 기도하면서 살지 못했고, 믿음으로 살지 못했고, 모든 사람에게 화평의 사랑으로 덕으로 이렇게 진실되이 살지 못했다 하는 것, 잘 산 것만 나오는 게 아니라 잘못 산 것만 자꾸 이래 나오니까 탄식이 됩니다. '어제는 내가 그래 살았는데 오늘은 내가 그래 안 살겠다' 하는 이것이 지금 탄식으로서 '왜 내가 이렇게 살지 못하고 이 모양이 되는가' 하는 그 잘못 산 데 대해서 탄식이 됩니다. 탄식이 어제보다 오늘 더 되고 오늘보다 내일 더 돼야 그 탄식으로 인해서 그 사람에게 기쁨이 더 되어지고 참 알속 있는 구원이 이루어져 가지 그 탄식이 차차 가벼워지면 안 됩니다. 탄식이 점점 무거워져야 그 사람은 점점 온전한 사람으로 돼 나아가는 것입니다.
'벗고자 함이 아니요'
'벗고자 함이 아니요' 이 말은 장막 생활을 벗고자 함이 아니요 그말입니다. '장막 생활을 벗고자 함이 아니요' 이 세상에서 직장 생활, 가정 생활, 부부 생활, 이 세상 생활 이런 것을 '아이, 그만 귀찮다. 이런 것 그만 없어 버리면 좋겠다' 하는 '벗고자 함이 아니요' 어서 직장 생활이고 사회 생활이고 가정 생활이고 부부 생활이고 모든 윤리 생활이고 도덕 생활이고 이런 것 귀찮으니까, 이런 모든 세상 생활 말입니다, 세상 생활, 세상에 속한 모든 생활을 그만 다 집어 치워 버리고 이 세상 생활 안 했으면 좋겠다 하는 그게 아니요 그말입니다. '벗고자 함이 아니요' 이 장막을 벗고자 함이 아니요,
이것을 벗어버리면 다시 못 입습니다. 이 장막 생활 벗어버리면 다시 못 입습니다. 예를 들어서, 결혼해 가지고 부부 생활 하는데 그만 부부 생활을 벗어서 부부 생활이 끝나 버렸으면 그것으로 끝나 버리지 다시 그 부부 생활을 새로 시작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암만 살아 있어도 하루 부부 생활, 하루 직장 생활 했으면, 하루 직장 생활 했으면 하루 직장 생활로서 끝나 버립니다. 하루 직장 생활로 끝나는데 끝나고 난 다음에 뒤에 다시 그 직장 생활을 할 수가 있느냐? 오늘 직장 생활한 그 직장 생활을 다시 할 수 없습니다. 내일 하는 것은 내일 직장 생활이지 오늘 직장 생활은 끝났기 때문에 다시 못 하는 것입니다.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늘 직장 생활 하는 직장 생활이, 오늘 가정 생활하는 가정 생활이, 오늘 사회 생활 하는 사회 생활이, 무슨 생활이든지 이 세상 생활 하는 이 생활이 오늘 세상 생활 한, 세상에 속한 이런 종류 저런 종류의 생활하는 이 세상 생활이 끝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벗고자 함이 아니다, 끝나기를 원하는 게 아니다 그말입니다.
'이 장막 생활을 벗고자 함이 아니요' 이 세상 생활을 벗고자 함이 아니요, 그러면 세상 생활 벗고자 함이 아니니까 세상 생활을 안 벗을 수 있는 길이 있다 말입니까 없다 말입니까? 안 벗을 수 있다 말입니다. 그러면 세상에 왔다 간 사람들, 세상에 왔다 간 안 믿는 모든 사람들은 그 하루 장막 생활 했으면 그 장막 생활이 다 끝이 났습니까 안 났습니까? 다 끝이 났습니다. 역사에 수억억만 명도 많이 왔다 갔지마는 한 사람도 하루 장막 생활 하면 그 장막 생활이 끝이 나지, 그 장막 생활을 벗지 않고 그대로 입고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입고 있으려고 하면 어떻게 하면 입고 있는 일이 되겠습니까? 만일 안 믿는 사람들이 그 장막 생활을 벗지 않고 입고 있으려고 하면 어떻게 하면 입고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시간을 중단시키면 하루의 장막 생활이 끝날 수 있습니까? 그날그날 그 시간을 다시 가지 못하도록 딱 붙잡아 맨다면 그날의 장막 생활은 스물 네 시간 지나가도 끝나지 않지요. 그러나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런데, 여기 말하기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했습니다. 이 장막 생활을 하루 지나가니까 하루 다 벗어버리고, 또 그 이튿날 장막 생활 하면 또 다시 만나지 못하게 벗어버리고 그렇게 착착 지나가고 있는데 '벗고자 함이 아니요' 하니까 그러면 안 벗을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이것을 벗어버리면 다시 입지 못하는데 이 장막 생활을 벗지 아니하고, '벗지 아니하고 덧입고자 함이니' 덧입는 것은 그러면 벗고 입는 것이 덧입는 것입니까 벗지 않고 입는 것이 덧입는 것입니까? 벗지 않고 입는 것이 덧입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루의 이 장막 생활이 열 두시가 지나가니까 다시는 오늘 입고 살던 이 세상살이, 내 고기덩어리나 마음의 요소나 고기덩어리의 모든 진액이나 요소나 내 사회나 내 분위기나 내 환경이나 그런 거 만나보지 못합니다. 열 두시 되면 벌써 오늘의 생활은 다 끝나 버렸습니다.
이런데, 열 두시가 지나가도 오늘의 생활이 끝나지 않고 영원히 끝나지 않는 길이 있습니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 길 '벗고자 함이 아니요 덧입고자 함이니' 이것은 벗지 않고 영원한 처소를 덧입고자 함이니, 이 장막을 벗지 않고 영원한 것을 덧입고자 함이니, 영원한 것을 덧입으니까 이 장막을 벗겨갈 자가 없습니다. 이 장막을 아무도 벗겨갈 자가 없습니다.
'벗고자 함이 아니요 덧입고자 함이니' 우리가 하루 장막 생활 하는 이 생활을 세상 모든 사람들은 하루가 지나가면 다시 만나 보지 못하게 끝이 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다시 두 번 만나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에 하루의 장막 생활 한 이것이 오늘이라는 이 시간은 지나가도 오늘에 해당된 내 장막 생활은 끝이 나지 않고, 없어지지 않고, 이 장막 생활이 끝이 나지 않는 그런 길이 있습니다. 끝이 나지 않는 그 길은 덧입으면 끝이 나지 않습니다. 뭘로? 하늘의 처소로 덧입어 버리면 이것은 영생으로 덧입었기 때문에 사망이 이걸 없애지를 못합니다. 소멸하지 못합니다. 사망이 없애지 못하고 소멸되지 않습니다.
'죽을 것이'
'죽을 것이' 없어질 것이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예를 들면 좋은 물고기 한 마리 잡았습니다. 물고기를 한 마리 잡았는데 그 물고기 그대로 두면 그 고기가 죽었으니까 그 다음에 썩을 것 아닙니까? 썩는데, 그 고기를 그 만일 산 사람이 먹었으면 그 고기는 뭣 되겠습니까? 산 사람이 먹었으면 그 고기는 죽은 것 됐습니까 산 사람의 피와 살과 기름과 영양이 됐겠습니까? 생명이 삼켰으니까 그 삼킨 그 생명이 살아 있을 때까지는 그것이 살아 있을 것 아닙니까? 고기는 죽었지마는 그 고기가 산 것이 돼 가지고, 산 것의 밥이 되고 산 것의 살이 되고 산 것의 피가 되고 산 것이 되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것으로 비유를 했습니다.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생명은 하나님과 연결입니다. 죽을 것이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져서 그런 것들이 하루라는 시간이 지나가 버리면 그것으로서 영원한 사망이 됐습니다. 한번 이 세상에 지나갔으면 그것은 조물주와 완전히 끊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지나갔으면 하루 동안 살던 거는 조물주와 완전히 끝이 났습니다. 끊어진 게 끝이 났습니다. 조물주와 끝이 났기 때문에 다시는 살아날 수가 없고 영영히 망하는 것인데,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하는 이 생명은 하나님과 연결입니다.
우리가 하루 사는 생활이 창조주와 끊어지는 그 일이 절단 완료가 될 수도 있고, 창조주와 결합 완료도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벗고자 함이 아니요' 하는 말은 내 심신이 이 세상살이 하루 하는 것으로서 영원히 존재가 끝장나고, 조물주와 끊어지고, 다시 사는 생명이라는 것은 끝이 나 버리고 이제는 사망으로 시작되어서 영원한 사망으로 시발되고, 사망으로 시발되고 생명으로서는 끝장나는 요것을 원하는 게 아니요, '벗고자 함이 아니요' 요것을 원하는 게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뭘 덧입습니까? 이것이 하나님과 끊어진 것이 완료되는, 끊어짐이 완료되는 이것 하기를 원치 아니하고, 하나님과 끊어짐이 완료되는 이것을 원치 아니하고 '벗고자 함이 아니고 덧입고자 함이니' 하나님과 완전 연결 완성, 완전 연결 완성되기를 원하는 것이니, 다시 말하면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과 끊어져서 영원 멸망받을 그것이 하나님과 영원한 연결이 돼 가지고 하나님과 연결된 그 생명에게 삼키워져서 하나님과 연결된 그 연결 속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연결 속에 들어가서, 하나님이 안 늙고 안 죽으니까 하나님과 연결된 것은 안 늙고 안 죽습니다. 하나님은 늙지 않고 죽지 않는 거기 완전 연결되어지기를 원한다, 끊어져 멸하기를 원하지 않고 완전 연결로 영생되기를 원한다 하는 그것을 가리켜서 여기 말하고 있습니다.
(86060433)
'짐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이것을 언제 썩지 아니할 하늘의 장막으로 덧입을까? 이것이 없어지기 전에 무너지기 전에 덧입어야 될 터인데 어정 어정 했다가는 무너지기 전에 덧입지 못할 터인데 덧입게 하는 기회는 한 번밖에 없으니 덧입게 하는 이 기회 한 번 있는데 이 기회를 놓칠까? 마음에 걱정되고 탄식되기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이 짐진 것같이 탄식된다.
왜? 무너질 장막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가졌다 하니 그것도 탄식이요, 무너질 처소 장막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제것이라고 가진 줄 아니 그것도 탄식, 이것을 하늘의 처소로 덧입을 수 있는 기회에 대해서 이렇게 전심이 기울어지지 않고 그런 기회를 불거트린 것을 생각하니 탄식, 이것을 하나도 불거트리지 않고 앞으로는 그 기회 기회마다 하늘의 처소로 빠짐없이 다 덧입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눌려.
어떻게 눌리는가? “무거운 짐진 것같이 눌린다” 무거운 짐은 질 때는 가벼워도 좀 지내니까 점점 무거워집니다. 질 때는 가벼워도 좀 있으니까 무거워집니다. 무거운 짐은 한 시간 지니까 더 무거워집니다. 두 시간 지니까 아무것도 아닌 게 더 무거워집니다. 점점 무거워집니다. 더 눌립니다.
예수를 한 해 믿으니 더 눌리고, 십 년 믿으니 더 눌리고, 나이가 늙으니 더 눌리고, 죽을 때가 되니까 더 눌리는 이것이 산 예수를 믿는 사람이지! 산 신앙이지! 처음에 믿을 때는 발발 떨고 야단을 지기다가 몇 해 믿고 나니까 퍼드러지고, 나중에 가서 나이가 늙어지니까 뭐 은퇴나 하고 망령이나 부리고, 젊은 사람들 신앙 가지면 ‘우리도 젊을 때는 저랬다.’ 이런 소리나 하고,
이 구원에 대한 갈급성이, 늙어지면 점점 마음이 눌리고 기가 막히고, 과거에 다 넘어뜨리고 파괴된 것도 생각하면 기가 막히고, 현재 여기 대해서 주력하지 못하는 것도 기가 막히고, 앞으로 빠짐 없이 하늘의 처소로 덧입어야 될 터인데 이것을 생각하니 심신이 눌려서, 심신이 눌리니까 다른 데 힘을 기울일 여가가 없고 마음을 쓸 여가 없고 여게만 전적으로 기울어져서 눌리는 이것이 정상적인 신앙인 것입니다.
(82021401)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그러므로 어짜든지 나는 예수 믿는 예수 안에 한없는 기쁨과 한없는 쾌락과 한없는 취미, 한없는 희망, 뭐 아무리 미국 같은 나라에 대통령 해 봤자 사 년 동안 임기 하는데, 또 사 년 아니라 영원히 가져 봤자, 나는 미국 그까짓 것. 하나만 가지지 않습니다. 미국 억억억만도 더 되는 것 하늘과 땅의 것을 다, 당신이 계약하기를 네가 그리스도의 것만 되면, 그리스도의 것만 되면 이 모든 것이 네 것 된다고 했으니까 나만 하나님의 것이 되면, 나만 하나님의 것이 되면 모든 것이 내것이 되어지는 이것은 절대 계약이요 또 이것을 믿어 보면 이것은 절대 불변일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것만 완전히 되면 하나님의 피조물은 내 것이 완전히 된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자기가 이성 비판적으로 계산적으로 확실히 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확고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요동치를 않는 것입니다. 이 소망에 살지. 그러기 때문에, 한 시간 일을 해도 말을 해도 이 소망을 가지고 말할 때에 넘치고 또 이것은 세상을 압도하고 모든 마귀는 달려들지를 못하고 우리는 참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존귀한 자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이렇게 지금 탄식하면서 지금 노력하는 것은 벗은 자들로 나타나지 않기 위해서, 벗은 자들로 나타나지 안 하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덧입기 위해서, 예수님의 재림 때 그때에 내가 가질 그것을 지금 가지기 위해서 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 이렇게 마음이 눌리는데, 미래 준비하기 위해서 마음이 눌리는 그 마음 눌림이 차차 가면 미래를 위해서 준비하는 준비가 차차 준비가 되어지니까 마음에 눌리는 것이 이제 중단이 됩니다. 마음이 눌리는 마음이 차차 차차 덜 눌리게 됩니다. 그, 눌리는. 준비에 눌린 마음이 차차 차차 가벼워지고 덜 눌리게 됩니다. 덜 눌리게 된다면 그 준비 할 것이 차차 적어졌다 말입니까 많아졌다 말입니까?
많아집니다. 자꾸 이것 준비하다가 앞으로 이것도 준비해야 되고 필요한 게 어떻게 많은지 뭐 바쁩니다. 준비할 게 많애. 준비하니까 그 준비는 영원한 것이니까 어떻게 기쁘고 즐거운지. 이런 사람이 땅 위에 없어질 그런 모는 돈이나 모든 지위나 권세나 명예나 그런 것을 탐해서 삽니까? 또 성경이 말했고 자기 양심이 말했고 판단해서 정말 정상적인 평가적의 것을 자기가 취하고 있는데 그런데 뭐 끌립니까? 그런데 끌리지 않습니다. 그런 것에게 미혹받지를 않는 것입니다.
* 살전5:8 :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85053040) 9
'벗고자 함이 아니요 덧입고자 함이라'
무슨 땅에 있는 장막집을 벗어버리고 싶은 것이 아니라 “덧입고자 함이라” 벗어버리면 어찌 됩니까? 벗어버리면 다시는 못 입습니다. 땅에 있는 장막집을 한번 벗어버리면 다시는 잡지도 못하고 가지지 못합니다. 한 번 벗었으면 그것으로 끝났습니다. 벗으면 끝납니다.
벗으려고 벗기 전에, 벗기 전에 하늘의 처소를 덧입으려고 해도 안 됩니다. 벗을 그때에, 벗을 그때에 벗지 않고 하늘에서 오는 처소를 겹쳐 입습니다. 옷 하나 입고 그 위에 또 우와기 덮어 입고 하는 것 덧입기, 덮어 입는 것, 덮어 입는 이것으로써 장막집이 영원한 집이 되는 요 한 방편뿐입니다.
그러기에 무너질 장막집을 영원한 집으로 개조하는 그 시기는 언제냐? 무너질 장막집을 벗는 그 시입니다, 바로. 벗는 그 시기에 하늘에 오는 처소를 덧입으면, 영원한 집을 더 덮쳐 입으면, 덮쳐 입으면 속에 무너질 장막집이 영원한 집으로 싸 버렸기 때문에, 영원한 집으로 폭 쌌기 때문에, 영원한 집으로 완전히 덮어 가리워서 그 안에 들었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덧입는 것이 뭐이 덧입는 것인가? 덧입는 것이 무너질 장막집, 자기의 없어지고 다 멸망받을 이 처지, 형편, 사정, 지위, 자기 몸, 자기 몸의 힘, 자기 마음의 힘 이것이 다 무너질 장막집인데 이것이 무너질 그때에 일차적으로 진리와 연결시켜서 진리화 합니다.
그러면 그다음에는 성령의 감화 감동에 연결시켜서 성령의 감화 감동의 영감화 됩니다. 그러면 그다음에는 하나님과 결합이 됩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죽을 것을 생명에게 삼킨바” 생명 안에 내포되도록 “하려 함이라” 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의 힘은 이 시간에 쓰이는 힘이 있고 그다음 시간에 쓰이는 힘이 있고, 이 시간에 쓰는 힘은 이 시간에 썼으면 그것은 끝났습니다.
우리는 마치 물통 안에 물이 하나 있는데 거기다가 구멍을 뚫어 놓으면 한 시간 흐르도록 구멍을 뚫으면 한 시간이면 다 흐르고 두 시간 흘러서 없어지도록 구멍 뚫어 놓으면 두 시간이면 다 흐릅니다. 인생의 모든 가진 것은 하나님이 한정해 놔서 그 한정을 다 지나면 그것은 완전히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한 시간을 살았으면 그 사람의 마음의 힘 몸의 힘 이것은 그만치 한 시간 지나갔으니까 감소됐습니다. 두 시간 지나갔으면 감소됐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사람들이 늙는다 그렇게 말합니다.
이렇게 감소되는 것, 이것을 그 현실에 감소될 그것이 진리와 연결됨으로 없어지는 것, 영감과 연결이 됨으로 끝나는 것, 하나님과 연결되어 끝나는 것, 연결되어 끝났으면 하나님과 진리와 영감으로 완전히 관계없이 악령과 악성과 악습과 연결되어 끝날 그것이 하나님과 영감과 진리와 연결되어서 끝을 마쳤습니다. 그것이 영생입니다. 영생.
그러기에 생명과 영생은 다릅니다. 생명은 한 번밖에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이 생명은 영원히 삽니다. 그러나 영생이라 하는 것은 단번에 이루는 것입니다. 영생은 단번에.
현실에서 그 시간에 쓰여질 마음의 힘, 그 시간에 쓰여질 몸의 힘, 그 시간에 쓰여질 모든 자기 물질, 그 시간에 쓰여질 자기의 지위, 그 시간에 쓰여질 자기 권세, 그 시간에 쓰여질 자기의 모든 자기의 형편 사정, 그 시간에 쓰여질 그것이 악령과 악성과 악습과 연결이 되어서 그것으로 끝났느냐? 그것으로 끝났느냐? 그것이 하나님과 영감과 진리에 연결된 것으로 끝났느냐? 요것이 하나는 영생이요 하나는 영원한 사망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벗고자 함이 아니요” 벗으면 안 돼. “덧입고자 함이라” 벗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들, 세상에 없는 것을 하늘나라에 가서 있으리라고 생각을 말아야 됩니다. 세상에 있는 것이 그것이 하늘의 것으로 개조됩니다. 성화가 됩니다.
우리의 새사람이라 하는 것이 새로 지은 것 아닙니다. 죽은 영을 진리와 영감으로 살린, 참 자기를 죽은 자기를 진리와 영감으로 살린 것이 우리 새사람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 첫째 아담의 것을 둘째 아담으로 다시 살리는 것이 우리의 구원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것을 한 번 벗으면 그 시간에 악령과 악성과 악습으로 연결시켜서 그 시간에 해당된 것이 끝났으면, 통에서 그 시간 한 방울 똑 떨어지는 그 방울이 이 그릇에 담기느냐 저 그릇에 담기느냐? 이제 떨어졌으면 그것은 다시 들어가지 못해. 다시는 떨어졌으니까 이쪽으로 오른편으로 옮겨져서 오른편으로 옮겨졌든지 왼편으로 옮겨졌든지 옮겨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기의 한 시간 요 시간에 살 때에 그 시간에 해당된 마음의 힘 몸의 힘 자기의 소유 모든 자기 처지 형편 사정 지위 자기의 이 무너질 장막집이, 요 현실에 해당된 장막집이 하늘에서 오는 처소를 덧입어 이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어서 생명화되어 영생화됐느냐 요것이 영원히 멸망할 멸망화됐느냐? 이러기 때문에 이것을 벗기를 원합니까 이제 이것을 덧입기를 원하겠습니까? 벗기를 원하지 않는다 했습니다.
(82022101)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몸을 입고, 마음을 입고, 행위를 입고, 이력을 입고, 자기의 소유를 입고, 자기 공간이나 이런 것들을 입고 사는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같이'
"짐진 것같이” 있어 갈수록 자꾸 무겁다 그말이오. 있어 갈수록 자꾸 눌려.
'벗고자 함이 아니요'
그러면 우리가 세상에 속한 마음의 힘, 몸의 힘, 모든 행위, 모든 세상 일, 세상에 있는 소유 이것을 ‘이까짓 거야 아무 소용없다. 이까짓 게 아무 소용없다. 집어던져 버려라. 내버려라.’
“벗고자 함이 아니라” 이것을 버리고자 함이 아니라. 이것을 버리고자 함이 아니라. 이것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뿐이라면 무너지고 다 썩어지고 없어질 것들이지마는 그게 없으면 하늘의 것을 덧입지를 못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벗고자 함이 아니요” 벗기 전에 하늘의 것을 덧입어서, 그 마음을 영감 마음 진리 마음, 영감화 진리화, 그 행위를, 행위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그 행위를, 행위를 진리화 행위, 진리 행위 영감 행위
자기가 사탕 장사를 해도 ‘사탕 장사 그까짓 거야’ 멸시하고 천대하고 사탕 장사를 버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탕 장사 그것이 진리대로의 사탕 장사했고 영감대로의 사탕 장사해서 그로 말미암아 사람도 변화됐고 자기는 거기에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나님으로 더불어 사귀어졌고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전달했고, 이 사람은 사탕 장사, 천인 만인이 전도를 해도 구원을 받지 못하고 전도를 부인했는데 이 사탕 장사에게 가서 사탕 한 개 살 때에 그 사람의 하는 그 사탕 장사에 감화를 받아 가지고 ‘햐, 이게 땅에 이런 사람이 있나? 이게 참 의인이로구나.’ 공으로 줘 그런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영감된 그 사람과 진리화된 그 권능에 그 사람이 변화됐다 말이오.
이렇게 우리의 믿기 전 마음도 귀하고, 힘도 귀하고, 땅에 있는 행동도 귀하고, 땅에 있는 이력도 귀하고, 땅에 있는 모든 소유도 귀합니다. 이대로 있으면 죽을 것이요, 썩을 것이요, 약한 것이요, 욕된 것이지마는 이것이 없으면 하늘의 것을 입지를 못합니다.
이것이 없어지기 전에 이것에다가 하나님과 연결되어서 하나님화 진리화되면, 이렇게 성화되고 변화되면 이것은 영원히 자기가 그 속에서 그것을 이용하고 사용하고 살 수 있는 영원한 처소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벗고자 함이 아니요 덧입고자 함이니“ 그러기에 기독교는 염세주의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염세주의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세상을 무시하는 게 아닙니다. 세상을 더럽다 안 합니다. 묘한 세상 주시고 아름다운 세상 줬다 했습니다.
그런고로 이 세상 이것은 이대로는 장막, 무너질 장막집이지마는 이것이 하늘의 처소가 와서 덧입기만 하면 영원한 처소, 영원히 자기가 그 속에서 그것 가지고 타고 다니고 사용하고 그것 속에서 편히 쉬고 하는 이것이 마련되기 때문에 “벗고자 함이 아니요” 요것을 우리가 확실히 믿어야 됩니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목부가 풀을 한짐 베다가 놨으니까 뿌리를 끊었으니 그 풀로는 생명이 끊어졌습니다. 생명이 끊어졌지마는 그것을 건강한 산 소가 어겅어겅 씹어먹고 나니까 조금 있다가 보니까 그 소의 피가 됐습니다. 소의 피가 되고 소의 기름이 됐습니다. 산 소의 피와 기름이 됐어.
죽은 풀이 풀보다 높은 승격, 높은 위치에 있는 소의 살이 되고 피가 되고 뼈가 됐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이 모든 저주 아래 있는 것, 사망 아래에 있는 것, 멸망할 걸로 되어 있는 이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면 산 게 됩니다.
생명에게 삼킨바 되다니? 하나님과 진리에게 삼킨바 되어 하나님과 진리와 연결이 되니까 이게 살아났습니다. 이게 살아났어. 영감과 진리와 연결이 되니까 영생으로 살아났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문제로 마음이 눌리기를 얼마나 눌리느냐? '무거운 짐진 것같이 눌린다'
(82021402)
'짐 진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이러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탄식하는 것은 무거운 짐진 거와같이 탄식한다 했습니다. 우리는 그만 조금 가다 처음에는 간절하다가 며칠 지나가면 그만 달라집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처음에는 뭐 불덩이같이 예수 믿다가 나중에는 나이가 많아지니까 그만 예수 믿는 믿음이 흐려지고 차차 차차 흐려지는 그것은 가짜배기 믿음이요 진짜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영생하는 것인데, 믿음이 뭐 육 칠십 년 살고 난 다음에 늙어진다면 그게 진짜 믿음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진짜 믿음은 나이가 늙어져 갈수록 몸이 말을 듣지 안하지, 몸이 말을 듣지 안하지, 그 마음이라 하는 것은 젊을 때 몇 십 배 더 간절해지고 노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바울이 말하기를 자기의 고민은 무슨 고민이냐? 무거운 짐진 고민과 같다. 그러면, 나에게 무거운 짐진 거와 같다 이랬는데 그러면 그 무거운 짐을 지면 처음이 무겁습니까 나중이 무겁습니까? 처음이 무겁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들어 보십시오. 갈수록 무겁다고 생각하는 분 들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갈수록 무겁습니다. 이걸 바울이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마음이 무거운 짐진 것과 같다' 그 말은 갈수록 자꾸 이 하늘나라에 가서 말하기를 '내가 벌거벗은 자로 나타나지 않기 위해서 했다. 내가 벌거벗은 자로 나타나지 않기 위해서 내가 덧입고자 하는 이 일에 대해서 고민되고 탄식하는 것은 무거운 짐진 거와 같다.' 그렇게 말했어. 그걸, 하늘나라의 구원 준비를 생각하니. 그 나라에 가서 이 마음의 기능이 필요한 걸 생각하니. 그 나라에 가서 이 고기덩어리의 기능이 필요한 걸 생각 하니 이 세상에서 일 분 일 초의 그 기능이라도 허비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래 살라고 하니까 고통이라 그 말이오. 이러니까, 그분이 나는 죄인 중에 괴수 죄인이라 말은 그렇게 할라고 쌓으니까 삐뚤어진 게 또 발견되고, 날마다 삐뚤어진 걸 발견하고 삐뚤어 진 걸 발견하고는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다.
그러나 고민이 어떤 고민이냐? 내 양심에 자책할 것이 없는 그때가 고민입니다. 뭐 잘못됐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을 때에 그때 바울이 고민이오. 발견됐을 때에는, 발견됐을 때는 다시 고치기 때문에 그 무상의 기쁨을 누렸던 것입니다.
* 고전3:15 :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85052233/06300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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