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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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요약  
■ 성경:19시편091:14-16
 

시91:14-16

1. 세상은 변하고 빨리 교체되는 것으로 운영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인생으로 땅에 뿌리를 박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과 그 뜻에 뿌리 박아 영원히 무성케 하려 하사 주권의지로 예정하셨고 주권능력으로 섭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됨으로 땅에 것을 소망하는 자들의 절망되고 고통되고 하는 여기에서 돌아서서 하나님을 향하는 자들에게는 평강에 평강으로 입음을 받게 됩니다.

인류를 셋으로 분류 할 수 있으니 첫째는 희로애락과 흥망 성쇠가 수 없이 바꾸어지는 여기에 속해 울고 웃고 근심하고 교만한 자로 사는 사람들이 있고, 둘째는 이렇게 변동됨에 불안함으로 불변하고 진실성 있는 정함이 있는 것들을 찾아 갈급하고 헤매는 이종교 창설자들이 있으니 이 수는 전자 보다 적고 거기에서 셋째로 변하는데서 불변을 교체되는데서 고정을 사망에서 영생성 가진것들을 마련하는 의인들도 있으니 곧 신앙의 사람들입니다. 우리 자신은 첫째 둘째 셋째 어디에 속하여 사는가를 시험하여 확정으로 자기를 평가해야 합니다.

2. 모든 세상 변동은 이로 인하여 주님과 연결하여 영원성의 것들을 마련하게 하려는 것인 이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을 자기의 피난처로 자기의 거처로 자기의 의뢰하는 소망으로 삼아 이렇게 되는 유일한 법칙인 주님의 말씀을 준행하고 영감으로 인도하는 인도를 따르는 자는 두려움이나 사망이 없고 생명과 평강만 갖게 됩니다.

신구약 성경의 참된 이치로 자기를 구원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으로 자기를 구원하시는 구주로 삼아 이 하나님이 자기의 구주가 되고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법칙으로 되어 있는 그 순서와 법칙으로 성경을 찾아 모든 절차를 완료하고 방편으로 성경의 인도와 영감 인도를 받는 자가 세상이 모르는 생명과 평강으로 충만케 됩니다. 이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구원입니다.

(77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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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14절에 있는 말씀 우리가 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환난과 궁지에서 구출함을 받는 하나님이 정한 법칙이 되어 있고. 또 하나님을 어떤 분이심을 아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 앞과 피조물 사이에서 자기가 높아지는 법칙이 되어 있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도 그러하고 믿는 사람들도 그러 합니다. 안 믿는 사람은 세상을 한계하고 그러하고 믿는 사람은 금생과 내세 영원에 그러합니다.

사람이 어떤 원치 아니하는 것이라도 거기서 내가 헤어 날라고 애를 쓰는 것은 다 생의 본능입니다. 생을 가진 사람들의 본능이나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어두워져서 모든 궁지에서 헤어나는 방편을 잊어 버렸습니다. 악령이 유혹해서 속이는 방편을 가르쳐 주었으니 곧 사람이 자기를 위하여 자기와 자기 아는 대로 이 모든 것의 도움을 입어 가지고 이 피조물로써 이 어려움을 면해 볼려고 하는 그것은 마귀가 준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방법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방편은 주 하나님을 사랑 하는 요것만 모든 어려움에서 벗어남을 받게 된다, 요 법칙 하나뿐입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이 법칙 외에 유혹 받은 사람들이 보고 피조물로써도 자기를 구출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할 만치 되는 것같이 보여지는 그것은 사람들의 눈이 근시자가 되어져서 전체면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결과까지 보면 모두 다 자기를 속이는 일이요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결과밖에 없습니다. 다만 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요것 하나로만 사람은 모든 원치 안하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는 것을 하나님이 진리로 정했기 때문에 이는 가감이나 변동이 없습니다.

또 사람이 육적으로나 영적으로 높아지는 이것도, 자기가 오늘보다 내일이, 젊어서보다 늙어서, 이 세상보다 영원 무궁한 세계, 이렇게 금생이나 내세나 영이나 육이나 자기가 보다 좀 나아지는, 향상하고 전진하고 더 가치 있게 되어지고 더 비판적으로 옳고 바르고 참되게 이렇게 깨끗해지는 이 모든 것은 인간들에게 하나님이 직접 맡기지 안했습니다. 인간들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방편을 유혹을 받아서 많이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타를 속이는 것뿐이지 실지의 결과는 없습니다.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다만 올라가는 것은 '저가 나를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하나님이 높여야 높아지지 인간이 스스로 자기를 높일려고 하는 것은 자기 아닌 자기, 욕심의 자기, 감정의 자기, 취미의 자기, 혈육의 자기. 모든 자기 아닌 자기 옛사람 이것의 장난이요 이것의 지금 공작으로써 거게 유혹 받고 귀한 재료와 시간을 다 이용당해서 도적 맞는 것뿐이지 아무런 실상은 이루어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높아지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요것 하나로 만 인생이 높아질 수 있다, 피조물도 높아질 수 있다, 모든 피조물도 높아 질 수 있다 하는 것을 하나님이 진리로 정하셨고 또 변치 않는 계약으로 우리에게 선포하셨기 때문에 여기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렇게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아는 자는 주께서 구하는 모든 간구를 들으십니다.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아는 자가 주님에게 간구할 때에 들으시지 주님을 잘못 알고 있는 그 사람이 주님을 사랑치 아니하고 미워하는 사람이 간구하는 소리를 주님이 들으시지 아니하시고 이루시는 것은 정반대입니다. 달라고 하는 것은 안 주실 것이요 있게 할라 하는 것은 없앨 것입니다. 왜? 그것이 그 본인에게 낫습니다. 잘못 알고 꺼꾸로 하기 때문에.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여" 환난을 당해서 모든 사람이 다 신앙을 팔고, 제 소망하고 의지하던 것이 다 갑자기 절단나 버리니까 사람들은 다 환장이 됩니다.

다 변질이 되고 변성이 됩니다. 모든 계획과 소유가 다 크게 변동됩니다. 이것이 환난인데.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희와 함께 하여" 이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는 사람이 생애하고 모든 계획해 놓은 것은 환난이 올수록 그는 반석 위에 세운 집과 같이 더 든든하게 드러나게 되고, 그 외에 다른 무슨 피조물 본위로 해 놓은 것은 다 헐어져서 넘어지게 됩니다.

"함께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그러므로, 환난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는 자를 영화롭게 그 실상의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이 환난을 일으키는 것이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피조물 본위로 해서 날뛰는 것을 다 진토에 떨어트리기 위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장수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며 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 하시도다’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장수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며 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 하시도다"

'장수함으로'
하나님이 왜, 영원 불변의 하나님이 장수라고 이렇게 나타냈는가?
우리는 너무 시간에 제한돼 있는 것을 그것을 보지 못하고 오늘 있다가 내일 없어질 것, 또 내가 살아 있을 때 만 있지 세상을 떠나면 없어질 것, 무궁세계에 가 가지고 없어질 것 그런 너무 시간의 제한을 받아 가지고, 이 시간의 이 제한을 초월해서 전 시간을 보는, 이 전체를 볼 수 있는 이 눈 뜬 자가 없고 모두 다 근시자. 모두 그 시야가 협착한 자, 그런 어두움에 빠져 있기 때문에

"내가 장수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며"
금생에도 내세에도 영원에도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을 아는 것은 그는 가감이나 변동이나 그런 것이 없습니다.
영원합니다. "만족케 하며 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 하시도다" 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아침에 생각고자 하는 것은, 주님을 내가 사랑하는지 안 사랑하는지 스스로 시험하는 일을 우리가 계속 매일 매시간에 할 것입니다. '나는 이것이 주님을 사랑하고 있나 사랑하지 않나?' 이 시험을 해 가지고 판단을 할 것이고, 또 하나는 주님을 사랑하는 연습을 할 것입니다. 우리는 연습함으로 숙달해집니다. 주님을 사랑할라고 애를 써서 한 번 두 번 하는 가운데서 주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지 안 사랑 하는지 시험하는 일과 주님을 사랑할라고 애쓰는 연습하는 일을 우리는 계속해야 되겠고, 또 하나는 이것이 주님을 아는 것인가? 내가 주님을 알고 있는가? 하는 것을 범사에서 시험할 것입니다. 또 자기의 언행심사의 모든 범사에서 주님을 아는 자 될라고 연습을 할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시험하고 연습하는 것이 우리 성도들의 전 생애요 전 승리요. 성공이요, 전 생명이요, 평강이요. 쾌락입니다.

그러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어떤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인가? 첫째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라면 하나님의 법칙에 맞나 안 맞나?' 하는 것이 자기를 시험해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칙에 맞도록 할라고 애를 쓰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하라고 하셨은즉 '내가 지금 이거 사랑하는 것이가 안 사랑하는 것이가? 사랑하고 있나 안 사랑 하고 있나?' 형제를 사랑하고 있는지 없는지 자기는 시험해 볼 것입니다. 그러나 요새 말세의 제일 큰 악마의 마귀라 큰 그물의 세력은, 악령의 큰 그물이요 세력이 되어 있는 그 사망의 폭탄은 사랑이요 화합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사랑을 구별하지 못하고 화합을 구별하지 못하면 그는 자유하는 것 같으나 큰 악령의 그물 속에 들었기 때문에 그물이 걷혀질 때는 다 저는 다 몰수해 들어가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느냐 사랑하고 있지 않느냐 스스로 시험해 보고 또 형제를 사랑할라고 연습을 해야 될 것입니다. 형제 사랑이 어떤 게 형제를 사랑하는 것인가? 사랑은 하나님에게만 있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어떤 건데?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대형. 대행. 대화친 해서 우리를 구속한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이 외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뭐 육적으로 밥 먹이고 먹이고 그것도 굶어 죽을 판이면 좋지만 하나님께서 모처럼 그 사람을 징계해서 깨달을 수 있게 하려는 거기서 밥 줘서 하나님의 일을 낭파시키고 못 줘서 낭파시키고 그 사람에게 어려움을 치료해서 낭파시키는 그런 일을 하지 말고, 그 사람 이 육이 어려울 때도 돕는 일을 하지만 우리는 무엇을 표준할 것이냐? 주님이 대속의 공로를 베풀어셨으니 우리는 형제를 죄에서 구출하는 것이 해방시키는 것이 사랑하는 것이오. 그 사람이 피조물에게 피동되지 안하고 하나님에게만 피동되도록 만드는 그것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오. 하나님을 제일로 모셔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대해서 모든 주권을 가지시고 모든 것의 다 주재로 이렇게 모시고, 살도록 이렇게 노력하는 것이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표준해서, 밥 먹이는 것이 그 사람이 이 세 가지 은혜에 도달함에 도움이 되면 밥 먹이고. 그 사람을 밥을 굶기는 것이 이 세 가지 은혜에 도달함에 도움이 되면 밥을 굶겨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적 사랑과 육의 사랑과 천국 사랑과 영원 사랑이 있으니 영원 사랑을 가지고 껍데기 세상 사랑까지 업어야 할 것이요 껍데기 세상 사랑에서 시작했다면 속으로 영원 사랑. 예수님의 구속에까지 도달해야 됩니다. 예수님의 구속은 알맹이요 타락한 뱀 사랑은 껍데기니 뱀 사랑에서 시작했으면 속에 하나님의 사랑에 도달해야 할것이요 하나님의 사랑에서 시작했으면 껍데기 뱀 사랑이라는 여기까지 손이 미쳐져야만 사람들에게 덕이 될 것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를 사랑하는지, 하는 것을 시험하고 연습할 때에 첫째는 내가 계명을 지키는 자인지 안 지키는 자인지,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계명을 지키는 것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라' 말씀했습니다. 또 형제를 사랑하고 있는지 사랑함이 아닌지. 또 사랑할라고 애쓰는 것이 그것이 연습하는 것입니다. 셋째로는 내가 예수님의 구속을 입고 있는지 시험하는 것이 그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인지 아닌지 시험하는 것입니다. 내가 구속을 입고 있는지. 내가 사죄를 입고 있나, 칭의를 입고 있나, 화친을 입고 있나? 주님이 죽기까지 하셔서 나를 죄 없이 살라 했는데 내가 죄 없이 해 주심을 입고 있어서 죄 없는 자로 지금 있느냐? 하나님에게만 피동되는 의로운 자로 있느냐? 하나님을 내가 모시고 있는 자냐? 이래서 주님의 이 세 가지 대속을 내가 입고 있는지 없는지 시험할 것이고, 또 이 세 가지 대속을 입고 더 입을라고 애를 쓰는 연습을 해야 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사랑하는데 시험하고 연습하는 것입니다.


"저가 나를 안즉"
"저가 나를 안즉" 우리가 내가 하나님을 알고 있나 없나? 하나님에게 대해서 무식한 자냐? 내가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 것을 내가 지금 아는 언행심사를 하고 있느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것을 내가 깜깜 모르는 거게는 상관이 없는 인간만 알고 인간만 상대해서 하고 있는 자이냐? 내가 시험할 것.

첫째는 하나님의 지극히 크심을 내가 알고 있는지? 그분이 자존자이신 것을 알고 있는지? 그분이 모든 것을 없는 가운데서 창조하신 분이심을 알고 있는지? 그분이 모든 것을 예정하시고 그대로 이루고 계시는 분임을 알고 있는지? 그분이 알지 못하심이 없으시며 능치 못하심 이 없으며 모든 것의 주인이시며 모든 것을 홀로 주권하고 계시는 이 우리 주 하나님이신 주님이 이렇게 어떻게 크신 분이라는 것을 주님의 크심을 내가 알고 있는 지 모르고 있는지 시험해 볼 것이고. 자기를 시험해 볼 것이고, 또 우리는 하나님의 크심을 내가 아는 자 되기 위해서 연습을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현실 현실에서 하나님의 크심을 내가 아는 자 될라고 내가 애를 쓰고 그렇게 힘을 써서 연습을 할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하시고 주권하시고 계시고. 크나 작으나 모든 것을 주권하시고 주재하시고 지극히 작은 것까지 하나 하나를 섭리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주권적 섭리. 하나님께서 크고 작은 모든 것을 홀로 당신이 주권하셔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움직이는 것, 개미 한 마리의 수염을 이리 흔들고 저리 흔드는 것도 당신이 주권적으로 다 섭리하고 계신다. 사람이 나고 죽는 것도, 이런 일 저런 일, 국제적으로 일어나는 일. 민족적으로 일어나는 일, 가정적으로 일어나는 일, 교계적으로 일어나는 일, 개인적으로 일어나는 일, 우리가 보는 삼라 만상의 모든 만물들의 움직이는 그 모든 것이 나를 구속하신 주님의 주권으로 움직여지니 공산주의가 독침을 내 속에 내밀어도 주님이, 주권자 되신 주님께서 주권의 섭리로 나에게 공산주의를 통해서 대고 있으니까 얼핏 보면은 공산주의 손에 나를 해하려는 독침이지만 그 껍데기를 떼고 주님의 주권 섭리를 내가 확실히 내가 깨달을 때에는 사랑하는 주님이 '네가 나를 사랑 하느냐? 나를 믿고 의지하고 바라 보느냐? 정말로 나를 아느냐?' 하는 것을 당신이 내게서 시험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대답은 '주여, 이것을 주님이 하신 것을 내가 압니다.

또 주님이 나에게 유익되게 하기 위해서 하심을 내가 압니다. 내가 여게 대해서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기뻐하는 뜻대로 내기에 하시기를 내가 원합니다. 바랍니다.' 하는 그것이 주님의 주권 섭리를 자기가 아는 자요, 알고 있는 자. 알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지 우리는 시험해 봐야 되겠고, 또 우리는 그것만이 아니고 주님을, 주님의 주권 섭리를 알라고 애를 써야 되겠습니다.' 아, 요것도 주님의 주권 섭리다. 주여, 나는 요것을 이제부터는 주님의 주권 섭리로 앞으로 인정하겠습니다.' 하는 요것을 자꾸 노력을 해야 될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주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도 아끼 아니하시고 구속 할라고 주셨고. 나를 사랑하심으로써 사랑 안에서 예택을 하셔서 이 예택을 이루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하나님처럼 온전하고 깨끗하고 거룩한 자 되어서 하나님의 모든 후사가 되도록 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이렇게 하셨으니 하나님의 이 사랑을 우리가 깨닫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함으로 모든 걸 예정하셨고, 사랑함으로 모든 걸 창조하셨고.

사랑하심으로 모든 것을 다 주권 섭리하시고 계시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알고 있는지?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행동을 하고 있나? 지금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지금 행동하고 있느냐? 내가 이 행동을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는 것이냐?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있는 것이냐?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냐 하는 이것을 스스로 시험해서 확정을 지워야 할 것이고, 또 우리는 그래도 깨달아 보면 자기는 하나님의 이 사랑을 안다는 것이 너무 빈약하다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이러니까. 또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을 연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지식하는 이 지식을, 하나님의 사랑을 지식하는 이 지식을 자꾸 연습해서 이 지식이 장성해지고 층만해지도록 우리는 노력을 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사랑하는 시험.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아닌지 시험하고 연습하고, 하나님을 아는 데 대해서 시험하고 연습해서 우리는 이 두 가지로만 모든 우리가 원치 안하는 일을 벗을 수 있고 우리가 원하고 하나님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을 우리가 취득할 수 있는 하나님이 정한 법칙이니 이 법칙 외에 다른 법칙을 쓰는 것은 다 뱀의 법칙이기 때문에 사람을 속여서 일시 달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미혹의 길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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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오늘 아침에는 이 봉독한 말씀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알고' 하는 이 두 가지 가지고 성공이 다 돼요. 주님을 사랑하는 것,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이것은 치료입니다.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하는 건 치료요. '저가 나를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이거는 성장입니다. 내나 꼭 같은 거라. 성장이라 말만 그렇게 표시했지 꼭 같은 거라.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알면 돼요.

이러니까. 우리는 오늘 아침에 주님을 사랑하는 것 주님을 아는 것이 두 가지인데, 두 가지인데. 두 가지가 한 가지가 둘씩으로서 이이는 사, 네 가지만 단단히 기억하고 갑시다.

하나는, '네가 시험해 보라.' 됐나 안 됐나 내가 시험해 보는 것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지. 주님을 내가 아는지 이렇게 아는가 모르는가 시험해 보고, '또 하나는 뭐이라 했지? 예? 잘 알고 있네. 나는 아롱 아롱해서 물었는데, 제자가 더 잘 아는구먼. 하나는 연습, 연습. 하나는 연습.

하나님을 내가 사랑 하는지 안 사랑하는지 한번 시험해 봐요. 내가 정말 그 내가 지금 이 말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말인가 이 태도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태도인가, 이 행동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행동인가, 이 말과 행동과 이 마음은 하나님을 아는 마음이며 아는 행동이며 아는 모든 말이냐? 뭐이냐? 이래서, 첫째는 시험해 보라, 고린도후서 13장 5절에 '스스로 네가 믿음에 있는가 없는가 시험해서 확정해라.' '아. 나는 믿음에 있다. 아이구, 이 면은 믿음에 없다.' 스스로 시험해 가지고 네가 확정을 해라. 공연히 얼떨떨 해 가지고 하지 말고. '아, 요거는 믿음이 없다. 요거는 믿음이 아니다. 고쳐라. 요거는 믿음이다.' 요렇게 시험해서 확정을 해라. 여기 시험해서 확정하고, 하나는 뭐이라고요? 하나는 뭐입니까? 성장하는 것? 내가 두 가지 말한 것 중에는 틀렸는데. 하나는 뭐입니까? 이거 참 모두 마음은 다 빼 놓고 나와 있는 가베. 아, 여기서 대답했는데 그걸 몰라요? 또? 그래도 몰라요? 연습! 연습 연습해야 돼.

연습해 나가면서, 그라면 나중에 자꾸 연단이 돼. 연단해도 계속 연습하면 나중에 연성이 돼요. 이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연습을 합니다. 자꾸 내가 사랑할라고, 내가 말로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마음으로 사랑할라고, 사랑하는 행동을 할라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라고, 사랑하는 일을 할라고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연습을 하고, 또 하나님을 아는 연습을 해요. '요렇게 하면 하나님을 내가 아는 것이다.' 아는 연습 하고 또 사랑하는 연습 하고. 또 사랑하는지 아는지 내가 심사해 가지고 알고 요 두 가지만 해 나가면 돼요.

‘사랑’
그러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주님이 하나님이요 하나님이 주님이십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 계명을 지키는 것, 또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내가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 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대속의 공로를 벗지 않고 입고 있는 것 이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라. 이걸 자꾸 시험도 해 보고 또 연습을 해요.

그 다음에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을 아는 것은 어떻게 아는가? 하나님의 지극히 크심을 알아서, 알면 두려워해요. 그분보다 큰 분이 없어. 그 분보다 큰 분이 없기 때문에 그분보다 두려워할 것이 없어. 그분을 알면 두려워하게 돼요. 모세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두려워할 대로 두려워할 자가 어디 있느냐? 암만 두려워해도 그분이 아직까지 그런 두려움이 아니고 그 분은 얼마나 두려우신 분인지 몰라.

얼마나 두려우신 분인지. 왜? 그분이 지극히 크기 때문에. 자존자시요. 당신이 모든 것을 목적하시고 그대로 이루시기 위해서 예정하신 분이요, 창조하신 분이요, 모든 것의 주재라 주권자라. 이러니까 그분이 지극히 커. 그분의 크심을 자꾸 내가 아나 모르 나 그분의 크심을 내가 아나 모르나 이걸 시험해 보고 '아. 내가 그분의 크심을 참 모르는 것이다. 그분의 전능을 모른다. 그분의 전지를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주님이 날 모르지' 해서 망령을 부리지. 또 그분을 아는 연습을 해요.

그 다음에 둘째로는 그분은 지공 지성하신 심판의 하나님이십니다. 지극히 거룩하고 지극히 공평되게 모든 것을 정확무오하게 그렇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심돤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이러니까, 내가 그분의 정확한 지공 지성의 심판을 아느냐? 이라면 제가 심판에 걸릴까 싶어서 잘못 된 거나 걱정할 일이지 그것 눈꼽재기만침 옳은 일 해 놓고 여게 대해서 안 알아 주는가. 여게 대해서 사람들이 알아 주지 않는가 이래 가지고 사람들에게 알릴라고, 이것을 뭐 광고를 할라고, 참 말하자면 정신 빠진자가 아니고 미친 자요. 우리가 미친 사람이라. 우리가 전부 보면 다 미켰소. 내가 저 아래도 언제 그 사람이 정신이, '정신 이상 아닌 사람이 있는가? 다 미쳤어.' 이 시간도 우리가 얘기하면서 안 미치면 다행이지만 미친 말 많이 해. 미친 말 미친 생각.

이렇게 하나님이 세밀하시고 철두 철미하게 모든 것을 행한 대로 갚으시는 심판의 하나님이신데 자기가 벌받을 거나 생각해서 고칠 것이나 주력할 일이지 뭐 내가 의를 행했는데 하나님이 잊어 버리고 안 줄까 싶어서 염려할 게 뭐이야? 받을 상은 시간이 지나가면 아무리 장변 해도 뭐. 고리대금 해도 달라장 해도 그까짓 거는 아무것도 아니라. 이거는 뭐 수백 배 수천 배로 자라갑니다. 수천 배로 자라가.

모르드개가. 보십시오. 모르드개가 행한 의가 숨겨져 있으니까 그게 자라갔소 안 자라갔소? 그때 요긴한 때 하나님이, 요긴할 때 어떻게 쓰는가? 오십층 나무 위에 모르드개를 달아 죽이려는 그때 하나님께서 그걸 딱 내다 쓰도록 딱 해버렸다 그말이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가 의를 행해 놓은 것은 가장 적절한 시기에 효력이 있도록, 가장 효력이 많도록 그렇게 해 주시는 하나님이니까. 그분이 전지 전능하시고 지공 지성의 심판자이신 것을 알 때에 자기의 의에 대해서 뭐 누가 알아 달라고 뭐 광고하는 참, 물론 이 세상의 정치가들은 자기를 선전하고 광고합니다.

광고하는 그거는 인제 해석을 잘하면 자기가, 그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전부를 희생을 할려고 하는 사람이 자기가 희생 할 자인 것을 다른 사람이 모르니까 희생할 자인 것을 알아서 자기가 희생 할 길을 찾는다고 해석을 하면 좋은 사람이고, 그 사람은 민족에서 칭찬할 수 있는 사람이고, 그게 아니라면, 자기를 광고해서 다른 사람이 인정해 달라고 하면 말짱한 미친 소리입니다. 미친 소리라.

‘저가 나를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저가 나를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그분의 지극히 크심을 알아서 내가 그분 앞에서 떨고, 그분의 지공 지성의 심판을 알아서 내가 발발 떨면서 조심하지 안할 수 없고, 그분의 사랑과 그분의 사랑과 계약을 알아서 모든 것 맡겨 놓고 바라보고 의지하고 하나 하나 복종 복종으로 착착 이렇게 이루어 나가는 건설 여게만, 그분의 사랑과 사랑의 계약을 알면. 그분 의 사랑과 그분의사랑의 계약을 알면 믿음 외에는 할 것이 없는 사람이 돼요. 이러니까,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 리라' '자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나를 안즉 저를 높이리라' 이 길은 필연한 일이기 때문에 이 외에는 다른 길이 없어요. 그러면, 이제 설교 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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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도 응답이 있는 기도

본문: 시편 91편 14절∼16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란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장수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며 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 하시도다'

1. 하나님의 인격을 생각하며 기도하라

가. 아는 만큼 바로 상대할 수 있다

시편 91편 14절로부터 요렇게 그만 요 본문대로 요렇게 해서 껍데기만 가르칠라고 하면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는 사람이라야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십니다. “저가 나를 사랑한즉” “저가 나를 안즉” 그라고 난 다음에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줄 아는 사람이라야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는 사람, 또 하나님을 사랑치 않는 사람은 그 간구를 하나님이 듣지 안하십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기도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어떤 분이라는 그 하나님의 신성과 신격을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신성을 가진 분이시다.’ 하나님은 자존자시며, 완전자시며, 영원 불변자시며, 단일성의 하나님이시며, 또 하나님은 완전한 지식을 가졌고, 지혜를 가졌고, 완전한 하나님의 중심으로 모두 움직입니다. 또 사랑을 가졌고, 진실을 가졌고, 거룩을 가졌고, 의를 가졌고 이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우리에게도 그게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그의, 인격이라 말하면 우리 사람에 대해서 그 격위를 인격이라고 말하고 또 신격이라 말하면 하나님의 그 격위에 대해서 신격이라고 말하는데 신격과 인격이 비슷합니다. 신격의 그 모형이, 신격을 닮은 것이 인격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신격을 가지셨고 우리 사람들은 하나님의 신격 닮은 그 인격을 가진 것이 우리 사람들입니다.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그 신격을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가 사람도 말이요, 사람을 서로 대할 때도 그 사람을 대하면 아주 바보를 대할 때와, 또 좀 아주 잘 치우치고 치우치는 그런 사람을 대할 때와, 또 그 사람이 말 같은 것을 조심하지 안해서 말 한 마디 해 놓으면 그 말이 굉장히 오전돼 나갈 그런 사람과, 또 그 사람은 무슨 감정의 사람이라 뭐 조그매 그 감정만 건드리고 일으키면 큰일날 그런 사람은 또 그대로 대합니다. 그 사람은 모든 면이 원만한 사람이라. 또 그런 사람 있습니다.

원만한 사람이면서도 그 사람은 그렇게 큰 실력이 없기 때문에 ‘뭐 원만해 봤자 저 원만하지 내게 무슨 상관 있느냐?’ 이렇지만 그 사람이 그 권세가 있고 지혜가 있고 나와의 직접 그 관련이 돼 있으면 그 사람의 비위를 상하지 안하고 그 사람의 비위를 맞출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 정상적인 것입니다.

사람이 제일 처음에 처녀들이 결혼했다고 하면은 결혼하면 자기 남편에게 대해서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니까 그 남편이 어떤 사람인가 이렇게 알아볼라고 애를 쓸 것입니다, 알아볼려고. ‘이 사람은 성질이 어떠하며, 마음은 어떠하고, 포부는 어떠하며, 사상은 어떠하며, 종교는 무엇이며, 또 그의 취미는 무엇이며, 그의 감정은 어떠한가, 그가 또 이미 기존적으로 가지고 있는 지식은 어떠하며 상식은 어떠한가?’ 이런 것을 여러모로 남편을 알아 볼라고 애쓸 것 아니겠습니까? 알아봐야 그분을 바로 상대하지 뭐 남자니까 남자지 여자니까 여자지 그것만 가지고 하는 사람은 그것은 온전한 결혼은 안 됩니다.

주님을 우리가 이 기도하는 데는 주님의 그 신격, 주님은 어떠한 분인가 하는 그 신격을 그를 내가 인정하고 연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연구하고 인정하면은 그분을 목석만큼 인정하면은 내가 그분에게 대해서 이 교제하는 대화하는 것이 목석을 대해서 대화하는 것같이 될 것이고, 또 그분을 아주 좀 똑똑하고 예민한 사람같이 대우하면은 그 사람에게 내가 사람만큼 내가 주의하고 내가 조심해서 내가 하게 될 것이고, 그 사람이 이 인간을 초월한 전지자요 전능자로 이렇게 참 믿으면은 전지 전능자기 때문에 그분을 상대할 때는 내가 전지 전능자로 상대하니까 나는 내대로는 그 사람에게 대해서 그분에게 대해서 실언하지 안할라고 또 삐뚤어진 것을 하지 안할라고 자꾸 이렇게 하게 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사람이 성자를 만나면 나도 거기에 대해서 성자적인 그런 무슨 대화를 할라고 애를 쓰게 되고, 또 정치가를 만나면 정치적인 대화할라고 말을 쓰고, 또 무슨 아주 유흥적인 이런 창기같은 그런 사람이면 또 그런 사람으로, 나로서는 죄되지 안하는 한 그런 사람으로 또 이래 상대할라고 애를 쓰고 자연히 이 사람이라는 건 인격과 인격이 만나면 상대방의 인격과 자기 인격이 서로 조화가 맞도록 할라 하는 이것이 필연적으로 있는 것입니다.

나.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신다

하나님을 상대해서 기도하는 것이나 또 그냥 생활할 때에도 어떤 사람은 ‘나는 나 혼자 생활하는데 하나님이 소경이네, 보겠느냐?’ 이라지만 나 생활하는 것을 다 살피고 있는 줄 아는 것이 그것이 성도입니다.

이래서 아가서에 보면은 “나의 사랑하는 자가 창살틈으로 나를 엿보고 있다” 그러면 자기는 혼자 이래도 주님은 어느 지금 모퉁이에서 지금 나를 보고 있는지, 그 창살틈에서, “창살틈에서 엿보고 있다”

내가 그런 말을 들었어. 어떤 사람이 결혼을 했는데 결혼했지만 뭐 요새 사람들은 결혼하면 막 서로한테 이래 다 알지만 옛날은 결혼해도 삼 년이 돼도 얼굴 잘 못 봅니다. 얼굴 잘 못 보니까 결혼한 사람이 자기 부인이 자기 남편을 보기 위해서 방에서 가만히 문을 닫고 바늘로 문구멍을 딱, 바늘로 딱 뚫으니까 그 밖에서 보입니까? 요래도 딱 눈동자를 딱 대고 보면 밖에 보인다 말입니다. 자기 신랑이 마당에 이리저리 돌아다니니까 아, 키는 얼마만큼 크다, 사람은 어떻게 생겼다 환하게 다 본다 말입니다.

환하게 다 보는 것처럼 이제 그와같이 나는 모르지만 주님이 어느 틈에선가 지금 내 언행심사의 모든 것을 보고 계신다. 그분이 보고 계시니 그분의 그 신격을 내가 상대해, 그 신격을 상대해서 사는, 그분이 무소부재라, 계시지 안하는 곳이 없다. 그분이 여기에도 계신다. 그분이 여기에도 계시고 저기에도 계신다. 그분은 나를 내게 관심을 가지고 너를 보고 계신다. 내가 말한 것도 그분이 들었다. 내 하는 행동도 그분이 들었다.

이제 그분을 인격 그 신격의 존재인 그분인 것을 자기가 자꾸 알고 그분을 내가 눈이 어두워서 몰랐지만 자꾸 보니까 보여진다 말입니다. 어린아이가 처음에 나 가지고는 어머니인지 뭐인지 아무것도 모르고 이랬지만 차차 이거 한 달 두 달 돼지니까 어머니를 안다 말입니다.

어머니 처음에 할 때에는 어머니가 그만 검은 옷을 입고 오면은, 검은 옷을 입고 오면은 웁니다. 어머니 아니라고 우요. 울다가 나중에 보니까 오랫동안 또 검은 옷을 입고 있으니까 ‘검은 옷 입고 오는 이가 내게 필요하고 좋은 것을 주는구나’ 이러다가서 나중에 그 어머니가 흰 옷을 입고 오면 그만 또 안 오고 자꾸 울다가 요래 그만, 어머니가 오면은 좋아하는데 어머니 아니라도 검은 옷 입은 사람이 오면 막 웃어 쌓아며 이래 좋아합니다. 그거 지금 눈이 쪼그매 떨어져 알아진다 말입니다. 이런 것 모양으로 차차 이러다가 나중에 얼굴을 알고, 또 사람의 얼굴을 알지만 얼굴 가운데서도 아, 이거 우리 어머니다, 어머니다, 아니다 얼굴을 알게 됩니다.

자꾸 이와같이 아는 것처럼 하나님의 그 인격 존재를 내가 상대해 가지고 그분을 점점 아는 가운데서 이래 자라가야 되지 그분을 신격 존재로서 내가 상대하지 안하고 이래 사는 그 신앙 아무리 살아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을 살지 안하는 통에 안 되고 기도도 또 응답이 안 되는 것이라 그 말입니다.

2. 기도 응답의 내용

가. 말씀을 생각나게 해 주신다

그래서, 이거 또 뭐 시간이 없으니까 간단하게 하는데, 그분은 인격 존재니까 인격 존재니 그분의 그 인격을 자꾸 내가 그분의 그 인격, 그분의 신격이라 말은, 이거 신격이라 말이나 인격이라 말이나 같은 말인데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자꾸 말합니다, 이거. 우리 인격과 같이 그분은 완전하신 신격을 가지신 분이라 그 말입니다.

가지신 분이니까 그분이 성미가 이런가, 그러면 이래 보니까 이래 보니까 성미를 알라고, 그분의 그 신격의 모든 신격이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을 알라고 하니까 그분이 선포해 놓으신 이 신구약 성경을 알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분을 이 신격으로 상대하게 되면은, 제일 처음에 우리가 기도할라 하면은 그분이 우리에게 응답하시는 것이 ‘주님’ 이렇게 부르고 주님 앞에 기도할라고 벌써 우리가 나서서 말이지, 기도할라고 앉든지 무릎을 꿇든지 이라고 나면은 그분은 벌써 내가 말하기 전에 당신이 벌써 응답을 해 주십니다. 응답해요.

이러니까, ‘성경이 뭐라고 말했느냐?’ 그 성경이 말한 대로 주님이 ‘네가 배운 것을 네가 어떻게 배웠으며 어떻게 들었으며 어떻게 읽었느냐?’ 하는 그것이 내게 떠오른다 말입니다. 주님을 상대할라 하니까 ‘성경에 뭐라고 했더라? 설교를 뭐라고 하시더라? 또 가르침을 내가 어떻게 받았다. 어떻게 들었다.’ 자연히 이것이 일호적으로 내게 생각이 납니다.

이러니까, 하나님은 신격 존재로 알고 내가 그분과 상대할라고 하면은 제일 일호에 그분이 내게 대해서 응답해 주는 것이 무엇이냐? ‘네가 어떻게 배웠느냐? 어떻게 들었느냐? 성경에 뭐라 했느냐?’ 이래서 ‘성경에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주님은 어떤 주님이라고 했지?’ 자꾸 이것을 찾게 됩니다. 필연적으로 찾게 돼요. 인제 그 응답을 바로 받았습니다.

나. 하나님의 요구를 알게 된다

그라고 나면은 둘째로는 무슨 응답을 해 주시느냐? ‘그러면 너는 지금 어떻게 했지?’ 하는 것을 말씀하게 됩니다. 요엘서 2장에 보면 “네가 옷을 찢지 말고 그 마음을 찢어서 네가 회개하라. 네가 모든 뭐 신혼 부부들도 다 나와서 회개하라. 다 금식하고 회개하라.” 이래서 그러면 하나님이 나에게 노하고 계시는 것이 뭐인가? 하나님의 노를 찾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노하고 계신다.’

하나님을 인격 존재로 상대할라 하니까 이분이 싫어하는 것이 뭐인가? 내게 싫어하는 것이 없는가? 싫어하는 것이 없는가? 그렇지 안해요? 여러분들이 이거 뭐, 보니까 자기 남편이 직장에서 퇴근해 돌아올 때가 되니까 어떤 부인도 보니까 누워서 이와같이 지금 이래 있다가도 자기 남편 퇴근해서 돌아올 때가 되니까 뭐 낯 씻고 세수하고 또 화장 바르고 또 옷도 갈아입고 이래 가지고 남편에게 잘 보일라고 그와같이 애쓰는 것이 이거 인격 존재의 필연성이라 말입니다.

당신이 내게 가르치는 첫째는 말씀을 나에게 깨닫게 하는 그것이 주님의 응답이요, 둘째로는 말씀을 가지고 당신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점점 알 때에, 알구로 하는 것이 당신이 나에게 대해서 요구하시는 거라 말입니다. 알면 좋아한다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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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 다음에도 3절에 보면은 자기가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지켜서 치우치지 안하고 그래 지키니까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뭐 성읍에 복 달라 했소? 또 모든 자손이 복 받고, 육체가 복 받고, 모든 짐승의 소생이 복 받고, 소유가 복 받고,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축복 받고 자꾸 복 받아 가지고 이래 되는 것이지.

이러니까 또 그러고, 보십시오. 엘리사가 엘리야를 따라갈 때에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뭐 달라고 간구하지 안했습니다. 자꾸 따라가기만 따라가. ‘여기에 있거라, 그만.’ `따라 갈랍니다. 따라 갈랍니다.' 따라가니까 이제 때가 되니까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있다가 말하기를 ‘나를 하나님께서 올려가기 전에 네 소원이 뭐꼬? 무슨 소원이 있어 나한테 따라오느냐? 네 소원이 뭐꼬?’ 이래 물어. 소원이 뭐꼬 물을 때에 영감을 소원하니까 ‘그러면 네가 이런 이런 방편으로 나를 올리워 갈 때까지 보지 안하면은 이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나를 바라봐라. 그러면 이루어질 것이다.’ 소원에 줬다 말입니다.

또 베드로도 보니까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니까 그 말씀만 이래 듣고 있는데 말씀을 듣고 있으니까 예수님께서 ‘베드로야, 저 너거 고기 잡아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3. 인격 대 인격 상대 기도를 하라

그러니까, 어쩌든지 그분을 서로 인격대 인격으로 이렇게 인격 상대를 하지 안하는 신앙은 이것은 죽은 신앙이지 이것은 부처와 같이 불교와 마찬가지로 이것은 우상 종교지 안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기도하는 것을 뭐라고 해? 기도에 대해서 조심할 것이 무슨 기도입니까? 기도에 대해 조심할 것 감상 기도도 소용 없는 것입니다. 감상 기도도 그건 유익은 있습니다. 성화는 좀 돼요. 그거 기도는 아니라. 기도와 성화되는 것은 차이가 얼마나 많으냐? 기도 들으면, 기도를 들어 주시면 얼마나 큰 성공입니까?

감상 기도, 또 이제 들어라 봐라 하는 설교 기도, 또 자꾸 주문을 외우는 주문 기도, 이거 다 소용이 없습니다. 장 버릇이 돼서 줄줄 줄줄 장 버릇하는 그것은 주문 기도라. 꼭 기도든지 신앙 생활이든지 주님의 그 신격을 상대하지 안하면 아무 소용 없습니다. 그분의 그 신격을 상대해서,

그러니까 길 가다가도 그분과 문답이 있어, 그분이 있는데 ‘이거 잘못 됐습니다. 이거 용서해 주십시오. 내가 이거 이럴 건데 잘못해서 이거 실수를 했습니다.’ 또 그분을 상대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사람에게 말 안 하고 ‘주님 내가 이거 잘못됐습니다.’

길을 가든지 일을 가든지 앉아서 성경을 보든지 꼭 그분을 신격 존재의, 그분의 속성을 생각하면 그분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열두 가지 속성 우리가 배우지 안했습니까? 이러니까 그분을 이런 신격 존재인 것을 우리가 알고 그대로 인정하고 행하는 것이 뭐입니까? 그분을 그런 신격으로 내가 상대해서 행동하는 것이 그것이 내가 행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전지자로 알면서 내가 행하는 것은 그분은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자로 이래 상대하는 그것은 그것은 행하는 것이 아니라 말입니다. 그분의 그 신격을 알고 인정하고 난 다음에는 내가, 알고 인정하면 필연적으로 내가 그분을 이 목석같이 상대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것도 들을 수 없는 것같이 상대할 수 없습니다.

그분의 그 신격을 찾아서 신격과 나의 인격이 교제하는 이 일이 있고 난 후라야 기도의 응답도 있는 것이고, 생활에 교정도 있는 것이고, 또 그에게 어떤 계획에 대해서 동행도 있는 것이고, 어떤 모든 환경 어떤 것이 한다 해도 담력도 나오는 것이고, 소망도 나오는 것이 나오는 것이지 그분의 그 인격 상대가 되지 안하면은 아무것도 안 되는 것입니다.

(87013160)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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