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문을 두었으되 닫을이 사람이 없으리라'
네 신앙 앞길을 환하게 형통하도록, 다니엘처럼 형통하도록 하겠다는 말입니다. 아무가 와도 가룰 것이 없이 그대로 주님 앞으로 바로 향하여 나아가는 그 걸음을 형통케 하고 아무 가리워 진 것이 없게 하겠다 하는 말입니다.
'내 이름을배반치 아니하였도다'
주님이 역사하시는 그 역사를 배반치 안했다 말입니다. 주님이 자기에게 역사하시는 그 역사를 같이 동행했지 배반치 않았습니다. 이 사람을 주님께서 열린 문을 두셨고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했습니다. 뭘 굳게 잡아? 네가 있는 힘 다해 가지고서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주님이 너를 인도하시는 그 인도에 따라 가려고 하는 그것을 네가 있는 힘을 다해서 하라 이것입니다.
( 89041560)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이 말씀은 주님의 말씀의 그 중량이 천지보다 무한히 뛰어난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크게 잘못된 것이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의 말과 같이 그렇게 평가하는 이런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날마다 새롭게 해서 이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성을 자꾸 자기가 믿고 인정하려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는 이 말씀에 '내 말'이라 하는 것은 신구약 성경 말씀을 다 총칭해서 말씀하신 것인데 신구약 성경 이 말씀은 천지는 없어져도 획 하나도 없어지지 안하고 다 요대로 이루어지는 이 말씀, 이 말씀의 신실성, 진실성, 이 말씀의 불변성, 이 말씀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완성성 이것을 내가 믿는 이것이 신앙의 모든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할 때에 제일 근본된 신앙이 뭐인고 하니 하나님의 말씀은 획 하나 변개시키는 것이 이 우주와 영계의 모든 피조물을 변개시키고 없애는 것보다 무한히 중량이 크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이 말씀이 창조하셨지마는 이 말씀은 모든 것을 창조하신 그 능력의 말씀이요 또 그 자체가 진리입니다. 이 말씀의 획 하나라도 없어진다고 말한다면 곧 하나님이 없어진다는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없어질 수 없음같이 이 말씀도 변동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신앙에 제일 기초적인 신앙이 이 신구약 성경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 없이 확신하는 이 일을 하는 것이 제일 기초적인 신앙 생활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은 이 말씀을 그대로 믿는 것에서 시작을 해야 합니다. 이 말씀을 자기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있는 전부를 다 기울여서 하나님의 도리를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리 믿는다 말은 성경에 기록한 대로 하나님도 믿고, 하나님의 능력도 믿고, 하나님의 사랑도 믿고, 하나님의 계획도 믿고, 목적도 믿고, 섭리도 믿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경 믿는다 말은 곧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다 믿는다는 그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믿는 것은 우리의 미약한 힘으로 시작하면 됩니다. 계3:8의 빌라델비아 교회에 보면, 여간한 힘이라고 했습니다. 보잘 것 없는 그 힘 아주 미약한 힘을 가리켜서 여간한 힘이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아주 그 미약한 힘 가지고서 하나님의 말씀과 주의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려고 있는 힘을 다 쓰는 그자에게 하나님께서 열린 문을 주셔서 다 승리케 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힘쓰는 자는 하늘나라를 얻는 것이요 자기의 실력을 가지고 무엇을 이루리라 생각하는 사람, 또 자기의 가진 실력을 다하지 안한 사람들은 얻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계3:10에서는 '네가 내 인내의 말을 지켰은즉 내가 너를 지켜서 모든 시험을 다 이기게 하겠다' 인내라 말은 계속이라 말입니다. 네가 내 계속의 말을 지켜서 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전부 계속 되는 데에서 성공이 있지 딴 데서는 성공이 없습니다.
*눅21:33 :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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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문을 두었으되'
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기가 아직까지 보지 못하고 당하지 못하고 자기가 한번도 겪지 못한 새 생활에 나아가는 것, 새 행동에 나아가는 것, 새 경험과 체험에 나아가는 것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문이 아닌 곳은 끝까지 쫙 보입니다. 문이 있는 데는 반드시 막혀 있고 그 문을 열고 들어가야 그 다음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자기 일생을 환하게 다 볼 수 있는 외통길인 줄로 알지만 첩첩이 문이 돼 있습니다. 한 첩을 바로 들어가면, 거기서 보는 것도 느끼는 것도 깨닫는 것도 경험하는 것도 체험하는 것도 다릅니다. 계3:8에는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본문의 이 좁고 험하지만 생명으로 나아가는 것은 무엇인가? 그 문은 뭐이며 길은 무엇인가? 문이라 말이나 길이라 말이나 같습니다. 길이라 말은 내가 한 자욱씩 밟아서 통과해 나가는 것을 가리켜 말했습니다. 어쨌든지 한 시간 살았으면 한 시간은 자기의 미래를 걸어나갔고 이제까지 살지 못하던 생활을 새로 한 것입니다. 늘 살던 생활이 아닙니다. 또 거기서 한 토막 가리워졌던 그 세계를 봅니다.
그러기에, 아무리 그 사람이 명철해도 스무 살 먹은 사람은 스물 한 살 먹은 바보의 경험과 체험을 모릅니다. 스물 한 살은 스물 한 살 돼야 그때에 그것을 알게 되고 서른 살에 경험하는 것은 서른 살이 돼야 경험합니다. 요새 컴퓨터 세상이니까 뭐 그것이 상관없다고 하는데 나이 많은 사람이 정치를 안하고 젊은 사람들이 정치를 가지면 그 나라가 망하는 징조다 성경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아이가 정권을 잡으면 그때는 완전히 망한 세상이라 성경은 말했습니다. 전지한 하나님이 말했는데 인간들은 뭐 통계 무슨 소리 하지만 우리는 성경을 믿어야 합니다.
* 마7:13 : 문
* 전10:16 : 왕은 어리고
* 사3:4 : 그가 또 아이들로 그들의 방백을 삼으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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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아무도 능히 닫지 못하리라' 주님이 우리의 신앙의 앞길을 형통케 하시면 아무도 방해하지 못하는 것을 말씀했습니다.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이 말씀은 아주 모든 면으로 빈약한 그 힘을 가지고도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 또, 주님의 이름을 배반치 아니했다 그랬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성경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또, 주님의 이름을 배반치 않는 것은 주님의 이름이라는 것은 주님의 이력을 말하는 것이니까 주님이 우리를 대속하신 그 대속을 저버리지 않는 것을 가리켜서 주의 이름을 배반치 아니한다 이랬습니다.
이런데, 여기 특별히 적은 힘 가지고 네가 지켰다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은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과 주의 대속을 입고 벗지 않는 이것은 택한 자면 누구든지 다 할 수 있다 하는 것을 여게 표현합니다. 적은 힘 가지고 지 켰으니까 많은 힘 가지고는 의례히 지킬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주의 말씀과 주의 공로를 배반치 안하고 입고 있는 것과 주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누구든지 다 택한 자면 다 지킬 수 있다 하는 그것을 여게다가 특별히 표현하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그 능력이 아주 적은 능력을 가진 사람도 있고 능력을 많이 가진 사람도 있는데 많이 가진 사람이 지킬 수 있는 일을 어떻게 적게 가진 사람이 지킬 수 있을까? 그것은 여게 적은 힘 가지고 지켰다 말은 많은 힘 가지고는 의례히 지킬 수 있기 때문에 많은 힘 가지고 지키지 안한 것은 말하지 안한 것입니다.
다른 데 성경을 본다든지 우리 신앙 경험을 통해서 능력이 있는 사람이나 아주 힘이 없는 사람이나 주님이 주시는 이 건설 구원을 이루는 것은 꼭 같습니다. 왜 같은가 하니 능력이 많은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그 많은 힘을 다해야 지킬 수 있는 그런 현실을 주십니다. 또, 아주 보잘 것 없는 적은 힘을 가진 사람에게는 그 적은 힘 가지고도 다하면 지킬 수 있는 고런 현실을 주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현실을 가지고 하나님이 조절하시기 때문에 그의 뭐 선천적이나 후천적으로 가진 능력이 많고 적은 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요는 다하는 거기에서만 결정은 되는 것입니다. 적은 힘을 받은 사람도 그 힘 다하면 주님의 말씀도 지킬 수 있고 또, 주님의 대속의 공로를 벗지 않고 입고 살 수 있고, 또, 많은 힘을 가진 사람도 뭐 적은 힘 가지고 지키니까 나는 많은 그 실력을 가졌으니까 내야 그 힘 적게 써도 될 것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지만 선천적으로 후천적으로 많은 힘을 주님이 주신 자에게는 또, 많은 힘 그것 다해야 지키는 고런 현실을 주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비유에 닷 냥중 가지고 열 냥중 만든 사람이나 두 냥중 가지고 넉 냥중 만든 사람이나 대우도 칭찬도 영접도 꼭 같은 영접과 대우와 칭찬을 하신 것입니다(마25:14-30). 그러기 때문에 누구든지 건설구원을 이루는 데에는 뭐 무식해도 상관없고 유식해도 상관없고 신체가 건강해도 상관없고 병신이라도 상관없고 또, 모든 지능이 뛰어나도 상관없고 아주 못난 그런 저능자라도 상관없다. 왜? 그렇게 선천적으로 후천적으로 그것을 많게 적게 해 주신 분이 주님이시요. 또, 주실 때도 그렇게 주셨고, 또, 이 두 가지를 지키는 데에도 주님께서 아야 많이 준 자에게는 많이 준 거 그거 다 해야 지키도록 고렇게 조절하시고 적게 준 자에게는 적게 준 거 고것만 다하면 또, 지킬 수 있도록 고렇게 현실을 가지고 어렵고 쉽게 조절하시기 때문에 다하는 자는 다 이길 수 있고 아무리 능력이 많은 자라도 다하지 않는 자는 이 건설구원은 이루지 못 한다 그것을 여기서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세상에서 모든 면에 부한 자나 가난한 자가 그렇게 구원 이루는 데는 꼭 같은데, 위험한 것은 부한 자는 교만하기 쉽고, 또, 게으르기 쉽기 때문에 이루기가 어려우니까 오히려 가난한 자가 믿음의 부요를 받았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가난한 자가 복 있다. 가난한 자가 믿음의 부요를 받았다. 부자들은 믿음의 부요함을 받은 사람들이 드물다 그렇게 말씀 했습니다.
그러니, 여게서 다하지 안하면 안 된다. 그러면 다한 자에게는 하나님이 열린 문을 주신다. 다한 자에게는 하나님이 열린 문을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열린 문 주면 아무도 닫을 자 없다. 그러면 여게까지 보면 우리의 가진 것을 다하면 아무도 방해할 자 없다. 가진 것만 다하면 건설구원은 아주 완전히 이루어 가질 수가 있다 하는 것을 여게서 볼 수 있습니다.
* 마25:14-30
(85040440) 9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누운뱅이라도 구원 이루는데에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아주 벙어리고 귀머거리고 아주 등신이라도 구원 이루는데 에는 아주 뛰어나게 잘난 사람이나 조금도 상관이 없습니다. 왜? 그것은 너희들이 감당치 못할 시험을 당치 않게 하신다(고전10:13)고 하신 말씀은 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그 모든 재간의 실력을 많이 준 자 적게 준 자 있는데 많이 준 자는 많이 준 그것을 다 가져야 주의 이름을 지키고 주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도록 요렇게 고 현실을 그렇게 만들어 주십니다. 많이 준 자에게는 어려운 현실을 만들어 주시고, 적게 준 자에게는 아주 쉬운 그런 현실을 만들어 주기 때문에 자본이 많고 적은 것이 상관없습니다. 적게 받은 자에게는 적은 거 가지고 다 하면 승리할 수 있고, 많이 가진 자는 그 많이 가 진 것을 다 하여야 승리하도록 그렇게, 그 현실을 그렇게 하나님이 조절해서 만들어 주시기 때문에 그 사람의 재간에 대해서는 많고 적은 것이 상관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계3:8에 적은 힘 가지고 이긴다는 거 요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하는 이 적은 능력이라는 말은, 능력이라 하니까 무슨 큰 것같이 생각하는데, 적은 힘이라 말이오. 적은 힘 가지고 지켰다, 그것은 여게 하는 말 속 뜻이 그겁니다. 어떻게 살을 한 되밖에 못 지고 갈 사람이 쌀을 한 가마니를 어떻게 지고 갈 수 있습니까? 못 지고 가는 것입니다. 요 말을 요것을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고 내 이름을 배반치 안했다 하는 요 말씀의 깊은 뜻을 우리가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그저 '아, 연약해도 자기의 힘을 다해서 이겼다' 이렇게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아주 보잘 것 없는 적은 힘 가지고 합격됐다 이 말씀은, 어떻게 적은 힘 가지고서, 큰 힘이라야 합격할 수 있는 일을 어떻게 적은 힘 가지고 합격할 수 있습니까? 안 됩니다. 이제 적은 힘 가지고 합격됐다 그 말은 적은 힘도 네가 다하니까 합격됐다 하는 요 말이오. 그러면. 많은 힘도 많은 힘 다해야 합격된다 하는 그것을 여게 표현한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은 많은 힘을 가지고 있는데 꼭 같은 현실의 어려움이라고 하면은 많은 힘 가진 사람이야 놀면서 자면서 해도 될 것이고 적은 힘 가진 사람은 죽자껏 해도 안 될 것 아닙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공의가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 힘을 주신 이가 하나님이시요, 또, 나에게 현실을 만들어 주신 이가 하나님이시니 적은 힘 준 자는 적은 힘도 다만 하면 하나님의 이 말씀과 이름을 배반치 않는 신앙 생활을 해 나갈 수가 있고, 신앙 생활 해 나갈 수 있도록 고런 현실 만들어 주시고, 많은 힘을 준 사람은 많은 힘 다해야 그 신앙을 유지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나님이 현실을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많이 받은 자도 많이 받은 거 다해야 되고, 적게 받은 자도 적게 받은 거 다하면 됩니다.
기독교는 다해야 되지 다하지 안하면 안 된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막12:30), 다른 데 보면 성품을 다하고(신6:5) 하는 말씀도 있는데, 어쨌든지 자기가 많이 가졌든지 적게 가졌든지 가진 것 다해야 통과된다 하는 것을 요것을 말씀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하지 않는 자는 아예 그것은 패전자인 줄을 알아야 됩니다.
* 고전10:13 :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 막12:30 :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85040553/0660) 9
'내 말을 지키며'
그러면 내 말을 지켰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뭐인고 하니 그것은 곧 영감의 말씀입니다, 영감 말씀. 내 말을 지켰다고 하는 내 말는 영감과 진리 둘을 가리켜서 내 말이라고 그렇게 거게 표시했고,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의 이름이라는 그 말은 무엇을 가리켰는고 하니 예수님의 공로, 예수님의 공로, 예수님의 그 공로, 예수님의 승리한 그 행적 그것을 가리켜서 내 이름이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예수님의 공로는 뭐이냐 하면은 곧 사죄 칭의 화친의 이 세 가지 대속이 예수님의 공로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요 각도로 이렇게 말하고 저 각도로 저렇게 말해서, 그러면 이름을 말을 한 가지로만 하면, 한 가지로 하면 쉬울 터인데 또 이렇게 말했다가 저렇게 말했다 하니까 복잡해지는 것 같지마는 한 가지로만 말하면 그것에 대한 그 각도를 다 빠져 놓기 때문에 이 모로 말할 때에는 이런 이름을 말하고 저 모로 말할 때는 저런 이름으로 말해서 그거 다 하나도 말하지 안하면 안 될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래서, 여게 예수님이 내 말이라고 말한 것은 영감과 진리 둘을 가리켜서 말하는 것이고 내 이름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의 곧 대속의 공로 사죄, 칭의, 화친 이 세 가지를 가리켜서 내 이름이라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열린 문을 두었으되'
이 세 가지를 지켰기 때문에 여게서 열린 문을 주었다 말은, 열린 문을 주었다 말은 하늘나라에 가는 그 승리의 길을 줬는데 “닫을 사람이 없다” 그러면 승리의 길을 줄 이 승리 길을 아무도 방해하지 못한다 그말입니다. 요 다섯 가지로 이긴 자에게는 아무도 방해하지를 못합니다.
(86091733) 5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이러기 때문에 문은 새로운 그 깨달음과 시작과 출발, 또 새로운 일, 새로운 소망, 무엇이든지 새 것을 발견하는 것이 그것이 문입니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것이 그게 문인데 빌라델비아 교회는 “너희 앞에 열린 문을 두었다” 그말은, 문 하나가 있는데 그 문 하나를 들어가는데 그 안에 또 문이 있고 또 문이 있는데 그 문을 주욱 이렇게 들어갈 수 있고,
또 “아무도 닫을 사람이 없다” 네게 앞에 새로운 깨달음으로 주욱 자꾸 한 칸 더 들어가고 한 칸 더 들어가고 한 칸 더 들어가는 그 문을 들어가도록 주님이 그와같이 해 주셨기 때문에 아무도 방해하지를 못한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면 어떤 자에게 그렇게 좋은 문을 자꾸 열어서 문 한 칸 들어가고 한 칸 들어가고 자꾸 들어갈 수가 있는가? 거게 말하기를 “네가 여간한, 연약한 힘을 가지고 내 말을 지키고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이랬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이 사람을 성하게 했다는 그 이름과 같은 이름입니다.
(86101530) 5
‘볼지어다‘
전능하신 능력을 가지고 권위있게 선포하는 것이며 또 이 교회에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늘 나타나 나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여 늘 위로와 힘을 주심 같이 이 교회도 그러함 같습니다. 오늘도 주님 당신을 대적하는 입장에 선 자들을 투쟁적으로 주시하심을 쉬지 아니하시는 동시에 당신만을 의지하여 그 뜻대로 살려는 자에게 위로와 권고와 은혜 역사를 쉬지 않으십니다.
‘내가 네 앞에’
함은 상술한 바와 같은 주께서 친히 하시는 그 권능을 가리켜 ‘내가‘라고 하시고 또 ‘내가 네 앞에‘함은 밀접한 동역의 성품을 나타내어 말함이요.
‘열린 문을 두었으되‘
박해 중에 있으나 이런 절대적인 구원을 이미 베풀었으니 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거짓 유대인들의 반대하는 입장에 선 그것이 벌써 주와 동행하는 입장이요 은혜 받은 증거이니 의로 인한 환난을 불리한 것으로 여기지 말아야 할 것을 뜻함입니다.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하신 것은 일층 더 강하게 내가 함께 하는 증거로 불의에게 대적이 되고 아무리 대적이 될지라도 주가 베푼 은혜를 제멸할 자 없고 주와 동행을 해할 자 없으리라는 절대성을 가진 위로와 소망과 담력을 주십니다. 일곱 교회 중에 독특한 일은 빌라델비아 교회에는 전부가 위로요 총 책임을 주가 지신 것을 말함과 원수를 대신 싸워 주시는 것을 늘 말하고 여러번 말하고 이러하신 주님으로 나타나신 것이 독특합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에는 무슨 독특한 장점이 있기에 이렇게 사랑하셨을까 다음으로 찾아보기로 하자.
‘내 말을 지키며‘
주님의 계시 말씀을 믿어야 할 부분을 믿고 소망하여야할 부분을 소망하고 회개하여야할 부분은 회개하고 맡기고 의지하여야할 부분은 의지하고 배반하며 끊어야할 부분은 배반하고 끊으며 담대하여야할 부분은 담대하고 인내할 부분은 인내하고 증거하여야 할 부분은 증거하고 함구하여야할 부분은 함구하고 바치며 충성하여야할 부분은 충성하는 것을 가르쳐 ‘내 말을 지키며‘라고 하였고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주님이 자기를 위하여 설정한 모든 공로와 행하시는 모든 구원 역사와 (모든 약속도 포함함) 당신이 계시한 그 속성대로의 인격을 올바로 신앙하고 에녹같이 대우하였던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떠한 빈궁이라도 만유의 주가 자기와 함께 계시니 약 먹기 위하여 혹은 소화불량을 인하여 부자인 부(父)가 절식(節食)시키는 것과 같이 여겼고 대적에 강한 세력 앞에 섰을 때에도 힘센 아버지의 품에 안긴 아이가 저보다 조금 큰 아이의 위험을 두려워함보다 오히려 아버지에게 그 무례한 아이가 꾸중 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을 오히려 가지게 되는 것처럼 인격적인 주를 참 동거주로 알아 대접하는 것이며 그의 말씀이면 실물 실재보다 더 진실되이 믿었던 행위를 가리켜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참 주님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는 자 은밀과 외식과 고독이 있을 수 없고 인간의 이목이나 그 입에 두려움까지 탈선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 앞에서 산다고 말을 쉽게 합니다. 그러나 어떨 때는 한 인격인 인간의 동거 대우도 주께 돌리지 못할 때가 없는지도 살피는 것이 지혜일 것입니다.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여기 ‘적은‘이란 말은 헬라 원어로 미크란이니 문법상으로 강세를 가지는 위치에 있고 그 뜻은 ‘작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빌라델비아 교회를 칭찬하신 이유는 소유한 영적 자원이 적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다 기울여 신앙 보수에 진력(盡力)한 까닭입니다. 그것은 그가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보시고 칭찬하신 것과 일예입니다. (마12:41-44) 사렙다의 한 과부를 칭찬하신 것도 이런 의미입니다. (눅4:26) 주님은 많은 것을 가지고 방종하는 자를 좋아하시지 않고 적은 것을 가지고 힘쓰는 자를 귀히 보십니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말씀을 지킨 것과 주의 이름을 배반치 아니한 것을 칭찬하심은 완전한 행위를 (절대성을 가진 행위가 아님) 가리켜 기뻐하심이 아닙니다.
계 3:2의 해석과 같이 주께 받은 영적 자원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기울려 충성한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므로 여기 대한 주님의 요구의 만족점이 가게하고 또 주 안에 있는 자는 누구든지 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위에 기록한 빌라델비아 교회의 특색 위로와 칭찬과 친밀을 원하시는 그 원인은 여기 있습니다. 말씀 파수와 그를 참 믿어드리는 일에 있어 있는 대로 다 충성한 이 점에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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